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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Nov 21. 2022

책을 읽고 기록하고 생각을 나누는 일

서브 캐릭터인 다정한 책식선생의 생각

하루키의 장편 소설을 1년 동안 읽는 중입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부터 시작해서 《기사단장 죽이기》에 이르기까지 1년 넘게 총 12권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매달 모임(온라인)을 통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책에 대해서, 하루키에 대해서, 그리고 각자의 생각에 대해서.


책을 오랫동안 읽지 않고 살았으므로 - 마치 삶을 풍랑 속에 내던져놓은 것처럼 - 그것에 대한 부채감으로 현재는 책에 거의 빠져들다시피 하며 살고 있습니다. 틈만 생기면 어디든 바로 책부터 펼칩니다. 주말에는 거의 새벽 4시까지 제 방은 불빛으로 환합니다. 심지어 출퇴근 길에는 더 간편하고 빠르게 책의 바다에 뛰어들고 싶어서 책가방(?)을 하나 들고 다닙니다. 책 한 권 정도가 들어가는 가벼운 태블릿 가방 같은 것이지요. 백팩에서 책을 수고스럽게 꺼내지 않아도 될 만큼 아주 편리한 독서 환경을 꾸민 것입니다.


읽는 작업과 동시에 필요한 것은 '기록'입니다. 비록 철저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의 전공(?)과 잘 맞는 노션에 페이지를 만들어놓고 꾸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혼자만 보려고 만들었다가 지금은 제 서브 캐릭터인 '다정한 책식선생'의 철학(?)에 따라 '다정한 책식선생의 큐레이션'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아래처럼 갤러리 형식으로 예쁘게(?) 꾸며보기도 했습니다.


갤러리 항목을 클릭하면 아래처럼 책의 대표 사진과 짧은 평, 그리고 제가 정한 추천지수(이름하여 책식지수), 책 속의 문장들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해놨습니다.


책 표지 사진(나름 설정 샷)
짧은 평과 책식지수(주관적인 평점)
책 속의 문장들

https://bit.ly/3DzCend


사실, 책을 읽는 작업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일인데, 굳이 노션에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거기에 '갤러리 보기'를 추가하고' 짧은 평'을 남기고 또 '책식지수' 그리고' 책 속의 한 문장'까지, 이런 불편하고도 거추장스러운 작업을 왜 하냐고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음, 그것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드리기는 다소 역부족이지만, 저만의 주관(?)을 말씀드리자면 바로 '읽고 배워서 남 주자'라는 작은 철학적 믿음 때문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읽고 배워서 남 주자' 세상에 '내 것' 챙기기도 바쁜 세상인데 배워서 남 주자니, 무슨 같잖고 건방진 태도라며, 그런 거창하면서도 이타주의적인 생각 따위는 도서관에서나 가서 하라고 일침을 가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책은 본래 터널처럼 한쪽에서 나머지 쪽으로만 향하는 '내 것'이라는 일방적인 속성을 가지기도 하지만, 읽는 작업과 느낌을 쓰는 작업(기록)을 통해서 '남의 것'이라는 다차원적인 속성을 동시에 갖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책을 읽습니다. 자신만의 뚜렷한 목표(성공)와 방향성(작가) 그리고 색채(주관)를 지니고 책을 일관성 있게 고르는 사람도 존재하지만, 누군가는 타인의 생각이나 주관 같은 것에 기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책은 바이러스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나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예상치 못한 파급력을 지닌 것이 책이 가진 느린 미학의 물결, 긍정적인 동화 작용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주장하는 '읽고 배워서 남주자', 라는 말엔 잘난 척하려는 의도가 아닌, 이번 달에 완독 한 책의 숫자를 거창하게 내세우려는 의도도 아닌, 그저 책 읽는 재미와 그것에서 비롯된 어떤 적극적인 의식과 행위를 누군가에게 전파하고 그 사람도 저처럼 책을 통해서 밝혀진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으로부터 삶의 변화가 시작되었으면 하는 소심한 바람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독서라는 행위에는 어떤 결연한 의도, 그러니까 직접적이면서도 간접적인 목적이 동시에 함유되어 있달까요. 그러니 내공이 쌓이면 혼자 골방에서 읽는 행위를 뛰어넘어서, 불특정 다수와 공유하려는 의지가 자연스럽게 태동되는 것이 독서의 속성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책일 읽는 행위, 그 시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작은 의지를 일으키고, 또 그 의지와 책에 새겨진 문장들이 융합되면서 미라처럼 굳어진 생각에 휘감겨버린 사람을 깨우고, 그래서 깊은 잠에서 일어난 사람은 변화의 가치를 깨닫고 책으로 더욱 침잠하게 되는, 책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자신이 책인지 책이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는 궁극의 경지, 그 길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정적인 책이 가진 동적인 특성이 아니겠습니까?


밤하늘을 바라보면 검은 하늘엔 별이 초롱초롱 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도시의 밤은 너무나 까맣고 칠흑 같아서 오직 상상하는 방식으로만 별이 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지만, 저 어두운 생명이라곤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밤 속에도 별들은 여전히 살아 숨 쉬며, 광막한 죽음보다 더 깊은 어둠 속에서도 서로 소통하며 생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약하나마 빛을 내며 존재를 과시합니다. 때론 제임스 웹과 같은 우주 망원경으로 우리는 우주의 감춰진 실체를 목격하기도 합니다. 아, 저 끝이 없는, 존재의 허무뿐인, 죽음이 전부인 암흑의 세계에서도 생명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경외심을 가슴에 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진 속에 드러난, 부끄럽게 피부를 드러낸 저 경이로운 별들은 과거의 일, 우리가 실존하기도 훨씬 머나먼 과거에 속하는 세상입니다. 오래전에 이미 죽어버린.


독서란 어쩌면 머나먼 별들 속에 세상을 동경하는 어떤 그리운 마음과도 비슷합니다. 책을 읽는 시점은 현재지만, 글은 과거 어느 순간에 속해있습니다. 마치,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으로 별의 어느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하듯, 행동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 것이 바로 책을 읽는 행위, 독서인 것입니다. 머나먼 과거, 어느 눈부시게 빛나던 별의 한창을, 과거의 기억을 잃지 않고 태초의 삶을 여전히 기억해내고 있는 외로운 별의 모습을, 작은 점이지만 하얗게 정체를 잃지 않는 별의 강직함을, 저는 별을 동경하며 어쩌면 별 보다 더 아름답게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는 책을 읽습니다.


별처럼 빛나는 책, 그중에서도 더 빛이 바랜 문학작품들, 손때가 잔뜩 묻은 도서관 한 귀퉁이, 먼지만 잔뜩 쌓여 있는 서가 가운데, 여러 사람의 손끝을 거쳐간, 들숨날숨을 쉬고 있는 오래된 책들에서, 저는 별과 같은 면을 봅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생각을 나누는 일, 마치 별을 매만지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별처럼 빛나는 하루키의 책을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같이 읽고 생각 나누기.

https://forms.gle/x9j1yfrjbHFa6ZRS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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