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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Nov 16. 2022

어둡고 음침한 공간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 지하에서 쓴 수기 》도스토옙스키, 창비




짧은 평(《지하에서 쓴 수기》, 도스토옙스키, 창비)


《지하에서 쓴 수기》는 도스토옙스키의 인생 역작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여기에는 그럴싸한 근거 데이터 같은 건 없다. 오직 내 생각, 내 관점이 전부니까. 내가 느끼는 의식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닌가. 여기 블로그에서 타인의 눈치를 살펴 가며 애써 데이터라는 걸 들먹거릴 이유 따위는 없다. 내가 그렇게 느끼면 그건 백 퍼센트나 마찬가지다. 내가 제일 소중하니까… 내 생각이…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소설은 첫 문장이 중요하다. 앞으로 전개될 분위기를 대체로 전망할 수 있으니까.


"나는 병자다…… 나는 못된 인간이다. 나는 매력이라곤 없는 사람이다."



지독한 자기 혐오자, 자기 파멸자, 자기 증오자가 아닌가? 굳이 왜 자기 자신에 대해 저렇게 표현을 하려는 걸까. 어떤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일까? 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을 치료하려 어떤 노력조차 펼치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가난 때문일까, 열등감 때문일까, 피해의식 때문일까, 그는 단 한 가지의 매력조차 없어서 타인에게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말하자면 완전히 소외된 인간, 배제된 인간으로 살아간다.


이 책은 극명하게 팬과 안티가 갈릴 것 같다. 음… 내가 이 책 혹은 도스토옙스키의 팬이라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자기 혐오자 축에 속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게 아닐까, 그런 망상을 하게 된다. 안티에 속한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나는 대체 주인공의 생각을 이해 못 하겠어. 대체 뭔 소리를 하려는 거야? 뭐가 문제야? 뭐가 그렇게 뒤틀려있고 불만 투성이인 거야? 그렇게 화만 내면 문제가 해결돼? 그리고 말이야 문체는 왜 이렇게 관념적인 거야? 이딴 책을 누가 읽는 거야? 아주 시간이 남아도는 할 일 없는 인간이나 골방에 처박혀서 남몰래 읽을 게 분명해! 그리고 나 도스토옙스키 읽었다고 자랑질이나 하려는 거라고!"라고.


모든 인간에겐 음침하고 어두운 공간, 플라톤이 언급한 동굴의 세계가 하나쯤은 존재할 것이다. 그 동굴의 밑바닥, 진창, 습하고 더럽고 끈끈하며 세상의 모든 찌꺼기 같은 것들이 거주하는 파멸적인 공간, 그러나 그 공간의 존재를 기피하고 외면할 수밖에 없는, 보호받아야 하고 때로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그럼에도 그 공간은 엄연히 나에게 존재하며 때로 그늘이지만 그렇다고 안전하게 피할 수도 없는, 그래서 그 존재 자체를 질시하고 터부시하게 되고, 암적이며 악마적인 공간이라 칭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그런 공간을 분명 알게 모르게 키워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공간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 음침한 구석이 존재한다는 걸 감추기 위해, 바깥에는 크리스마스 선물 꾸러미같이 생긴 원색으로 포장된 세계만 타인에게 보여준다. 나는 점점 다른 사람, 본질과는 거리가 더 멀어지고 그렇게 될수록 나는 더 색채가 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악몽을 꾼다. 나는 포근하고 다정한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난 들판을 누군가와 걷고 있다. 그러니까 고요히 사색을 하며 황혼을 벗 삼아가며 뭔가 시적인 공상을 주무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순간 나는 현실이든 저 내면의 두꺼운 껍질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적 본성, 분노, 억압, 부끄러움, 자학, 질시, 허세, 오기, 짜증, 황폐함이든 모든 더러운 속성을 잊고 황홀함에 젖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담을 쌓고 혼자서 고독을 즐기겠다며 모든 사실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분노를 느껴도 표출하지 못하고 세상에 발산하지 못한다. 그것이야말로 교육받은 이성의 힘이야, 나는 생각하는 인간, 사피엔스의 혜택을 입은 후예, 은혜롭고 자비로운 인간, 품위라는 외피에 둘러싸인 인간이라고 스스로 정의를 내세운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이는 면은 그럴싸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결코 단 한 가지도 바뀐 게 없다. 여전히 내 안의 더럽고 음침한 본성은 내가 삶을 시작함과 동시에 죽을 때까지 함께 할 테니. 애써 무시하고 그런 건 나와 상관없다고 거짓으로 허세질을 부려도 여전히 나는 어두운 본능에게 유혹을 당하고 서서히 굴복하는 자가 되어갈 테니까.


《지하에서 쓴 수기》는 그러한 현실을 아프게 건드린다. 아마도 정신이 파괴됨으로써 그 결과를 받아들이게 되면 정신과 육체가 동시에 분열될 것만 같은 기괴한 모멸감이 밀려올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 역시 소설이 만들어 놓은 소설가의 정교한 장치가 아닌가. 인간은 고통을 느낄 수 있고 그 고통을 희열로 바꿀 자격을 유일하게 갖춘 우주의 유일무이한 존재니까. 나는 그 사실을 괴멸적인 근거로 받아들이지 않고 무언가 교훈을 갖춘 형태로 변형을 시키는 것이다.


마치 《지하에서 쓴 수기》를 읽고 나 자신에 대해 고백을 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저 추상적인 언어로 그 세계를 잠시나마 규탄하고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한다. 상처는 봉합되고 치유되어야 하니까. 아픈 마음으로 통증만을 느끼며 세상에 계속 분노를 내뱉으며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다만, 나만의 어두운 지하 세계, 그 세계를 억지로 찾아내서 들쑤시고 헤집어 놓지는 않는다. 그저 존재하는 것 자체를 인식하고 인정했을 뿐이다. 나의 지하의 세계는 여전히 음습하다. 거기에 어떤 괴물이 똬리를 틀고 누워 있을지 예측 불가다. 여전히 감추어 두고 들키지 않으려 애쓴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나의 자존심, 보호해야 할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의 지하, 나의 동굴, 나의 불순물이 가득한 음침한 구석, 피하고 외면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그 어두운 세계를 나는 받아들인다. 어떻게? 《지하에서 쓴 수기》를 읽고 통렬하게 자기비판을 하는 의식적인 행사를 통해서, 나의 거만하고 자만심 가득한, 말하자면 화사한 포장지에 숨겨진 표면을 살짝 떼어내는 이런 고백적인 글쓰기를 통해서, 나는 잠시나마 숨을 쉬어보는 것이다. 어두운 세계에 깨끗한 공기를 불어넣어 본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세계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잠시나마 그의 음습한 공간에 머물러 보는 것도…


책식지수


책 속의 한 문장  

나는 여러 차례나 벌레가 되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벌레보다 못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많은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병이다.

그 모든 참회, 그 모든 감동, 다시 태어나겠다는 그 모든 맹세가 거짓이다.

인간은 자기의 이익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너저분한 짓을 한다고. 인간을 계몽해 그에게 제대로 된 진짜 이익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면 그는 곧바로 너저분한 짓을 중단하고, 착하고 고상한 사람이 된다고. 왜냐하면 계몽되어 자신의 진짜 이익을 깨닫게 된 나머지 선행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인간은 목적을 달성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그 목적에 완전히 도달하길 꺼려한다. 이 어찌 우습지 않은가? 이걸 보면 인간은 한마디로 코믹한 존재다. 분명 여기에는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2×2=4라는 수학적 확실성은 도저히 참고 넘길 수 없다. 내 생각으로 2×2=4는 불한당이다. 2×2-4는 양손을 허리춤에 얹은 채 여러분의 길을 가로막고 침을 뱉어대는 거만한 멋쟁이 같다. 나는 2×2=4가 탁월한 것이라고 인정하나, 2×2=5도 그에 못지않게 멋진 것이라고 칭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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