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산문? 소설?
재택근무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이라는 것은 순전히 자의적 판단에서 근거한 것. 그것은 내 의도를 따르겠다고 판정한 것에 불과했다. 그래 나는 더 이상 회사에서, 불편한 열정이라는 가치가 포장된 공간에서 거주하지 않겠다고 분열을 도모한 것이다. 거기에 타협은 없다. 노동자의 권리장전처럼 나는 근로자로서 누릴 마땅한 지위를 취하려 할 뿐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환멸, 공간에 대한 오랜 혐오, 직장이라는 체념적 환경에 대한 기피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싶다. 특히 회사와 관련된 것이라면. 나는 뻗어나가는 존재, 뻗치는 존재가 아닌가.
나는 기꺼이 희생양이 된다. 나의 과거는 여전히 죽음을 경험하고 있지만, 나의 미래, 다음 월요일부터는 새로운 낯선 죽음을 매일 체험해야 한다. 죽음은 몰락과 체념을 조장하지만 나는 짧은 정신적 죽음을 통해서 생의 이면이 가진 달콤한 맛을 본다. 나는 다행히 살아 있는 것이다. 살아서 일이라는 단단한 기둥에 매어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씨조차 구원해 주지 못하는, 죄악으로부터 복권되지 못하는 나의 위대한 절망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재택근무는 해방, 적어도 나에겐 해방이다. 나의 어설픈 출구전략이다. 나의 해방일지는 재택근무가 진행될 작은 서재에서 태어난다. 나는 그 거처를 타인의 도움 없이 꾸려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다. 회사와 다름없는 집과 회사, 두 가지의 구별이 사라지는, 주거의 개념이 아닌 업무의 개념이 압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될, 재택근무지를 그려보며, 마치 보스가 명령하는 것처럼, 똑같은 자세로 나에게 명령을 내린다. 나는 진지한 자세로 듣는다. 실제로는 흘려보내고 있지만.
그 결정에 따라 나는 재택근무를 실시한다. 나의 이상적 세계는 슬슬 구현이 되려나. 아니면 회사에서 작게나마 탈출을 하게 되려나. 회사에서 멀어지면, 그러니까 출퇴근으로 인한 지하철과 버스에서 매일 만나는 비슷하게 생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바쁘게 뛰어가는 저 불쌍한 영혼들을 다시 만나지 않게 되려나. 그들은 그들의 길로, 나는 나의 길로 가게 되려나. 우린 동지가 아니었나? 검은 옷을 입은 영원한 사제가 아니었나?
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될 수 있으려나. 나는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나는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인물이고, 자본주의가 키운 공포의 범주이고, 자본주의를 혐오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자본주의에 기대는 모순적인 노예니까. 그러므로 나는 재택근무라는 잔잔한 수면 위에 폭정적인 불안을 함께 띄워두는 것이다.
재택근무 결정에 따라 나는 나의 재능, 아껴둘 필요가 하나도 없는 몹쓸 재능을 마이크로 매니징을 위한 환경에 쏟아부었다. 말하자면 나의 철없는 근본들을, 나의 불량스러운 일거수일투족을 상시적으로 관찰 가능한 모든 방법을, 나의 밀실을 은폐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나는 갱생한다. 죽음을 극복하고 일에 능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다시 언급하자면, 노션 페이지를 만들었다. 그것은 삶을 가장하는 일이며, 삶을 구입하는 일이며, 나를 또 하나의 방패로서 막아서는 일이다. 그 노션 페이지에는 요청 사항과 요청에 따른 진행 상황, 두 가지 측면을 감시하도록 만들었다. 그 페이지만 엿보면 내가 누구인지, 아니 내가 어떤 일에 붙들려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거짓이라는 것이 언젠가 드러날지도 모른다. 진정한 나는 점점 안으로 안으로 더 깊숙한 거처로, 은닉이 가능한 더 어두운 공간으로 이동해야 한다. 나는 그런 것까지 기록해야 한다. 넌 그곳에 있어야 한다. 제 위치를 찾아! 그곳에서 일을 해야만 한다. 기록되지 않는 하루는 없는 것이다. 네가 없는 곳엔 너만 없는 게 아니라 너의 일도 없다. 따라서 너는 대가를 받지 못한다. 일하지 않는 자는 취할 자격도 없다. 그래서 나는 기록 전선에 뛰어든다.
물론 기록은 내가 한다. 주도적인 작업의 결과가 기록물이다. 나는 조금은 들떴고 솔직히 말하면 다소 심각하게 고양되어 거의 춤을 칭 지경이었다고 진술하고 싶다. 그것도 기록하려고 이렇게 일기를, 아니 산문을 쓴다. 하지만 나는 충동적인 인간이면서도 동시에 움츠려 드는 인간이기 때문에, 겉으로 본심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정신에게 간섭한다. 정신은 짜증을 낸다. 불만을 토로한다. 자신을 내버려 두라고, 어디까지 삶을 까발려야 하냐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글을 쓰면서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혼란을 안기고 싶다. 이것은 오직 글로서만 존재한다고 어쩌면 개념적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내가 써서 표현하는 세계는 내가 속한 곳이 아니며, 나는 가상의 공간에서나 자유를 찾았을 뿐이라고. 그러니 재택근무는 사실 허위에 해당되고 나는 지금 허구로 포장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떠들고 있을 뿐이라고.
그러한 이론에서 출발한다면 나는 지금 이부자리에 여전히 누워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세계를 꿈꾸고 있는, 눈을 감거나 어쩌면 눈을 감아도 좀체 떠오르지 않는 그런 허무의 세계를 억지로 들춰내려고 몸부림치는 이 글은 그런 너저분한 인생의 수기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진실을 말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인가, 나라는 존재를 엄호하는 바깥의 문지기인가. 그 호위 무사는 진정 나를 보호하는 건 맞을까? 그가 진실을 거짓으로 위장하면서도 그 거짓이 더 진실처럼 받아들여진다면, 그 안에 숨어 있는, 자신이 진정한 존재라고 믿는 그 근원적 존재는 진실을 여전히 가슴에 꼭 움켜쥐고 있으면 되는 걸까.
나는 현재에 머무르지만 동시에 현존하지 않는, 겨우 글을 써야 드러나는 존재, 물리적 충돌을 거듭하면서도 이 손가락 끝이 접촉하는 키보드의 표면과 그것으로부터의 마찰이 빚어내는 신기한 조합을 두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의심을 거둘 수 없고, 일기인 듯, 소설인 듯, 산문의 한 형태라고 정신 어딘가에서 주장을 펼치지만 그 사실도 금세 가라앉고 말 거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 수밖에 없다.
나는 결국 체념하고 공허의 바닥으로 침잠한다. 나는 먼지고 먼지의 일부분이고 먼지가 창조한 불순물이고 먼지 그 자체로서 완벽하지도 못한 온갖 평범한 물질들의 복합체다. 그런데, 나는 재택근무를 공상한다. 그래서 다시 겉멋에 빠진 나머지 사이트에 접속해서 필요한 물품들을 결제하기 시작한다. 34인치 커브드 모니터를 결제하고 키보드와 마우스, 특히 인체공학적이라는 명칭이 붙은 자본주의의 산물을 집중적으로 검색하고 그것을 장바구니에 넣고, 다시 카드로 결제를 시도한다. 승인이 떨어진 대상이 내 방, 서재 안쪽까지 무사하게, 시간의 개입 없이 온전하게 배달되는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본다. 물론 그 과정엔 내가 함유되어 있다. 하지만 내 자본은 소모되지 않는다. 회사는 자본을 들여서 내가 일할 공간을 대신 꾸며준다. 그 안에서 나만의 자유, 아니 일정한 범위 내에서 한정적인 자유를 누리기 위한 복사된 공간을. 그러니 나는 여전히 가짜다. 내 과거는 이미 몰락했고 내 미래도 발가벗겨진 채로 회사에 보도될 것이다. 보도의 주체는 물론 몰락한 자가 담당한다. 몰락한 자가 몰락한 대상을 취재하고 나는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그 안에서 주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근무에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