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 소설
강남역에서 나와 정처없이 어디론가 걸어가는 중인데 오토바이 엔진이 굉음을 내며 내 뒤쪽에서 앞쪽으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검은 헬멧을 쓴 남자는 마침 전단지를 뿌렸는데 그중의 한 장이 운 나쁘게도 내 얼굴을 날카롭게 스쳤다.
“아야!” 전단지가 내 볼에 살짝 스크래치를 낸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전단지를 배포함 범인은 교차로를 지나 삼성역 쪽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볼을 만져보니 살짝 피가 비치는 것 같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그런데 길거리에 널려 있는 광고지 가운데 유달리 내 눈길을 끄는 게 있었다. 물론,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처럼 내가 주목한 광고지에는 그런 헐벗은 여자는 없었다. 나는 대체로 그런 사진에는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 전단지에는 아주 커다란 글씨로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지옥완독클럽”
궁금하면 강남 교보문고 지하 4층으로. PM 10:00에 이벤트 시작.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색다른 기대감에 빠진 나머지, 도저히 그 '지옥완독클럽'이라는 곳을 거부할 자신이 없었다. 독서습관을 진지하게 쌓으려면 이 정도의 충격적인 요법도 필요하지 않을까? 단테의 지옥이 연상되는 그 클럽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4시간 정도는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다, 지하 4층으로 내려가면 되는 것이다. 교보문고에서 4시간 정도 보내는 일은 전혀 책을 읽지 않는 나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고통스럽게 몸을 배배 꼬며 책을 읽다가, 카페에서 유튜브를 보며 시나몬 라테를 홀짝거리다가 폐점 시간이 되자마자 지하 4층으로 이동하기 위해 본관 1층으로 다시 이동했다.
1층 엘리베이터 앞에는 검은 정장과 깔 이라도 맞춘 듯 검은 장갑을 쓴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그 남자는 빳빳하고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유달리 큰 검지 끝으로 지하 4층이라는 빨간 숫자가 찍힌 비상구 앞을 가리켰다. 비상구 위쪽 벽에는 돋을새김이 된 “지옥완독클럽 본부”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언제부터 교보문고에 이런 장소가 있었지?’ 이상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단순한 이벤트라는 생각이 들어 괘념치 않았다. 문을 열고 비상구 안으로 들어서자 위쪽에서 마치 범인을 취조하는 듯한 음산한 빛의 조명이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아래쪽으로 차례대로 점등되기 시작했다. 마치 예민한 센서라도 달려 있는 것처럼 내가 한 발짝 발을 내디디면 다음 발걸음에 맞춰서 백열등이 기다렸다는 듯이 작동됐다. 벽은 생각보다 오래되고 지저분했다.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기기묘묘한 낙서들과 기괴하며 혐오스러운 악마의 형상들이 도처에 조각품처럼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특히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지독하게 쾌쾌한 냄새가 났다. 아주 오래된 세탁물, 마치 노숙자 수백 명이 몇 십 년 동안 빨래라는 행사는 구경조차 못 해본 것 같은 그런 꿉꿉하고 눅진한 냄새들이 동시에 집결한 것과 비슷한 기분 나쁜 기운들이 흘러 올라왔는데, 게다가 낡은 백열등 끝에서는 마치 빗물이 새는 낡은 슬레이트 지붕에서 축축하고 뜨거운 것들이 연달아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아마도 100개의 계단은 거쳐간 것 같다. 1층에서 지하 4층까지 가기 위해 그 정도의 계단이 존재하는 게 과연 가능한지, 나는 교보문고의 입체적 형태를 떠올려보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리 상상해도 그게 잘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가장 아래쪽에 다다른 나는 다시 비상구를 밀어서 건물 안쪽으로 몸을 피하는데 성공했다. 어깨에는 구정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
어깨에 묻은 불순물들을 대충 털어내고 폭이 60센티 정도되는 복도를 따라 느리게 걸었다. 복도는 그래도 비교적 깨끗했다. 잿빛의 벽체도 중간중간 굳게 닫힌 문들도 비교적 멀쩡했으니까.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으며 살금살금 앞쪽으로 이동했다. 모든 문은 다 똑같았다. 아무런 색채도 정보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수십 개의 문을 따라서 앞쪽으로 계속 이동하다, 마지막 문을 발견했다.
“지옥완독클럽”
노크를 살짝 하고 문을 조심히 열고 안쪽으로 진입했다.
“어서 와”
“네? 여기가 지옥완독클럽인가요?”
“그래, 어리석은 녀석치곤 잘 찾아왔군그래. 지난주까지는 제대로 생겨먹은 녀석이 단 한 명도 없었는데 말이지. 이제야 제대로 굴러가려나. 거기 편한 데 앉도록 해”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하도록 하지. 여긴 자네가 찾는 지옥완독클럽일세, 자네는 아마도 책을 읽고 싶어서 이곳을 찾았겠지? 그래, 아주 잘 찾아온 게야. 자네가 원하는 걸 이곳에서 완벽하게 이룩하게 될 거라고 내가 장담하지. 약속한단 말일세. 그래 한 번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자리부터 하나 고르면 돼. 자리를 찾으면 읽을 책을 안내하도록 하지”
아마도 지옥완독클럽의 운영자라고 생각되는 그 늙은이는 한마디로 탐욕이 가득한 두꺼비처럼 생겼더랬다. 위아래 입술이 잔뜩 부푼 나머지 터질 것처럼 정면으로 돌출된 상태였고 두 눈은 퀭해서 눈동자 밑이 구덩이처럼 패어있었으며 코는 들창코에 양미간의 가운데 지점에는 온갖 형태의 비열한 주름들이 가득했다. 게다가 책을 많이 읽어서였는지 작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들창코 밑으로 거의 처진 상태였다. 그 두꺼비가 한 마디 한 마디를 던질 때마다 불어 터진 입속에서 더러운 파편이 튀겨나가는 바람에 나는 그것을 피하느라 너무나 힘들었다.
“자, 자리를 잡았으면 옆방에 가서 책을 골라오면 돼요. 책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읽고 싶은 책을 고르면 되는 거야. 우리는 절대 강요하지 않아. 고객의 선택을 인정한다니까. 옆방에 가서 취향에 맞는 책을 신중하게 골라오도록 해요.”
나는 마틸다의 나오는 무서운 교장 선생인지, 두꺼비가 인간으로 둔갑한 요괴인지 알 수 없는 놈의 지시를 따라 옆방으로 이동했다.
나는 먼저 옆방으로 이동하기 전에 이곳 책 읽는 환경을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이곳은 흡사 고3을 위한 입시생 독서실처럼 생겼다. 한 사람이 앉을 만한 비좁은 책상과 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고 총 10개 정도의 자리가 2열로 배치되어 있었다. 남은 자리는 3개 정도 듬성듬성 비어있었는데, 그 자리를 제외하곤 사람들이 고개를 깊숙이 처박고 어떤 책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나는 옆방으로 이동해서 서재를 오고 가며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왕이면 두꺼운 책을 고르는 게 어떨까 싶었다. 러셀의 서양철학사, 서양미술사, 이희승의 국어 대백과 사전,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합본판 등을 걸쳐서 뒤쪽 책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마치 보르헤스가 쓴 '바벨의 도서관'에 나오는 책들처럼 굉장히 두껍지만 글자는 들쭉날쭉 크기가 다른 책들이 제목도 없는 채로 꽂혀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한 권의 책을 고심하다 골랐다. 왠지 이런 곳이라면 바벨의 도서관에 걸맞은 책을 골라야 할 것 같았다.
<바벨의 도서관에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는 문자가 각인된 책들을 찾아 영원히 여행을 떠나는 법>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책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물론 내용은 살펴보지 않는다. 그저 끌리는 대로 나의 본능을 믿어보는 것이다.
나는 내 자리에 돌아와 두껍고 육중한 <바벨의 도서관에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는 문자가 각인된 책들을 찾아 영원히 여행을 떠나는 법> 을 펼쳤다. 그렇지만 첫 페이지에서부터 책장을 계속 넘겨도 아무런 글자도 찍혀 있지 않았다. 그저 흰 여백만 가득했던 것이다.
“저기요… 여기 글자가 인쇄되어 있지 않은데요? 잘못된 것 같은데요. 다른 책으로 바꿔와도 될까요?”
“닥쳐! 여기서 교환은 절대 안 돼. 어떤 일도 되돌릴 수 없어. 선택하면 그대로 밀고 가는 거야. 네가 선택한 결과 아니야. 무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여긴 노인정이 아니라고! 괘씸한 녀석”
나는 한숨을 쉬고 책에 다시 집중하려는데 그때 사건이 터졌다. 책 양쪽에서 수갑이, 그래 수갑이 툭 튀어나온 것이었다. 수갑 끝엔 쥐꼬리 같은 쇠사슬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 쇠사슬은 다시 책등으로 연결된 모양이었다. 쇠사슬이 저절로 움직이더니 수갑이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스르르 움직여 내 양쪽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더니 말 그대로 족쇄를 채우는 것이었다. 철컥! 소리가 나더니 내 양쪽 손목과 책은 한 몸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책을 완독하기 전에는 절대 이 지옥완독클럽에서 탈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냐하하. 완독하기 전까지는 절대 나가지 못한다고! 여긴 지옥완독클럽이야. 지옥을 맛보게 해주지. 자, 빨리 읽어 읽으란 말이야. 게으르게 앉아서 대체 뭐 하는 거야. 이 멍청한 녀석아! 어서 빨리 완독해. 완독 못하면 빵이고 밥이고 없어. 완독 아니면 죽음이라고!”
“자 주위를 둘러보라고 완독 못한 녀석들이 어떤 꼴을 맞이했는지, 저 사진을 봐, 앙뚜와네뜨처럼 생긴 여자가 결국 완독을 포기하고 목이 댕강 잘려나간 걸 보라고. 저건 우리의 자랑이야. 우리의 기념품인 거지. 완독하겠다고 건방을 떨던 녀석들의 최후를 구경하라고. 우리의 전리품들이 빛나지 않아? 완독을 못하면 얼마나 무서운 꼴을 당하는지 이제 알겠지? 흠흠, 알아도 아무 소용 없어 들어오는 건 네 자유로운 선택이었지만, 나가는 건 절대 네 선택과 상관없거든. 이제 네 자유가 아니라 내 자유만이 허락되는 세상인 거야. 나는 네 자유를 구속했다.”
“게다가 졸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존다는 건 완독을 포기했다는 걸로 받아들이니까. 이곳의 규칙이야 그게. 졸아도 죽는다. 배고파도 죽는다. 책을 바꿔도 죽는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죽는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와 연애질해도 죽는다. 완독하지 못해도 죽는다. 어차피 너는 죽을지도 모르지. 뭐 그래도 운이 좋으면 완독할 수도 있으니까 열심히 읽어봐.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 건데. 완독하지 않고도 거짓으로 완독했다고 말해도 죽는 거야. 다 읽으면 내가 꼼꼼하게 시험을 볼 예정이거든.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거기서 딱 맞춰 내가 질문을 던질 거야. 대답을 못하면 바로 죽는 거야. 댕강! 목이 잘리는 거지!”
“여기는 지옥완독클럽이야. 자 열심히 읽기 시작하라고 난 여기서 해바라기씨나 씹으면서 기다릴 테니까. 그리고 간식 따위는 국물도 없을 테니까 기대하지도 말고, 헝그리 복서 정신으로 읽으란 말이야! 아… 따분해. 요즘 녀석들은 정말 따분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