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 소설
“내 자리예요…” 누군가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소곤거리는 듯했다.
“……’
“아줌마… 내 자리라고요…” 누군가 볼륨 미터를 우측으로 돌린 것처럼 용량이 조금 늘어났다.
“……”
“아줌마! 내 자리라고요! 나와요 엉! 사람이 말을 하는데 들은 체도 안 해! 이 아줌마 양심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좋은 말 할 때 말귀 좀 들어먹으라고 엉!”
“헉!”
나는 크게 놀랐지만, 그렇다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고 그냥 심장 박동이 최대 피크를 친 것 같았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싶었으나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계속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다행히 내가 아줌마가 아니라는 사실이 안도감을 주긴 했으나, 여전히 내가 타깃이 된 것 같은 불안한 기운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단잠은 이미 저 멀리 여행을 떠난 상태였고.
그럼에도 나는 눈을 감은 채, 보이지 않는 풍경을 스케치해 보고 싶었다. 시각적인 정보 없이 오직 청각만으로 장면을 재생하는 것도 일종의 글쓰기 훈련이 아닌가. 어쩌면 지금 일어난 사건이야말로 요즘 목마른 글감에 단비라도 적셔줄지 모를 일이 아닌가.
“네가 자리라도 맡아놨어? 먼저 앉은 사람이 임자지. 어디 벌건 대낮에 철부지 같은 게 버릇없이 말이야. 너는 노인 공경이란 것도 몰라? 요즘 어린 것들은 말이야. 아무한테나 손가락부터 들이대고 삿대질이라니까. 하룻강아지 같은 게!”
“뭐라고요? 아줌마 지금 뭐라고 했어요? 나더러 하룻강아지라고요? 전 아줌마 같은 몹쓸 어른을 모셔 둔 적도 없고요 아줌마처럼 사회규범조차 지키니 않는 늙은 호구 같은 것들을 공경할 생각도 없으니까, 닥치고 내 자리나 쳐내놔요. 저리 꺼지란 말이야” 앙칼지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귓구멍을 후벼 파는 듯했다.
“아니 지하철이 말이야. 언제부터 네 자리 내 자리가 있었냐고. 여기가 무슨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이라도 되는 줄 알아? 그런 자리라는 건 네 집 안방에서 찾든지 여유 있게 예약이라도 하든지 하라고, 나는 여기에 아까부터 앉았으니까, 이 순환선이 3바퀴 돌 동안 줄기차게 앉아 있어야겠어” 고집스러운 아줌마, 아니 할줌마라고 해야 하나? 암튼 그런 늙은 구렁이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줌마, 지금 아줌마가 어디에 앉아 있는 줄 알아요? 임산부석이라고요. 임산부 석이 뭐 하는 자리인 줄은 알아요? 모르겠죠. 모를 거야. 아니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떡 하니 가운데 박힌 글자를 읽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그리고 색깔을 봐봐요. 핑크색 시트가 안 보여요? 아줌마 색깔 구분할 줄 모르는 거 아니죠? 그렇겠죠. 아줌마도 아이 낳아봤을 텐데, 아이 낳은 기억조차 모두 잊어버리셨겠죠. 그럴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설마 아무리 여자의 적이 여자라고는 하지만, 아줌마가 그런 것도 모르고 임산부석에 앉았겠어요. 이해해요. 무식하고 자리 구분할 줄 모르는 게 어디 아줌마 잘못이겠냐고요. 이해해요.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용서를 빌면 내가 넓은 마음으로 다 적선하듯 자비를 베풀어 줄 테니까, 후딱 자리에서 일어나 저 지하철 다음 칸으로 꽁무니 빼듯 사라지라고요!”
아줌마는 그 이후 침묵을 지켰다. 아줌마도 그리고 배 나온 여자??도, 그러니까 아줌마가 앉은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주장하는 여자, 소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아줌마의 비양심을 규탄하던 여자도 동시에 침묵을 유지하는 듯했다. 나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 또한 의자에 앉은, 자리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침묵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마치 지하철 저 끝 쪽이 커다란 환기구라도 되는 듯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그쪽으로 빨려가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고 거의 숨이 막힐 뻔했다.
임산부 석에 서 있던 젊은 여자?의 배가 거의 당장이라도 폭발하고야 말 풍선처럼 거의 최대의 규모로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다, 사람의 배가 그렇게 실시간으로 용적을 늘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착각이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자의 그 무지막지한 배, 커다랗게 세력을 키우는 어마어마한 뱃살도 여자의 넓적한 얼굴도 모두 활화산처럼 당장이라도 용암을 바깥으로 내뿜을 것처럼, 질주하고 내달리고, 폭풍처럼 강풍과 비바람을 몰아치고, 입에서는 온갖 분노의 파편들이 날카로운 화살촉처럼, 정면으로 당장이라도 무섭게 쏟아부을 여름날의 주먹만 한 우박처럼 요란스러운 움직임을 개시하기 시작했으니, 당장이라도 여자의 입이 용맹스러운 활화산으로 탈바꿈할 하듯이, 제 위용을 드러낼 것만 같았다.
여자의 배는 부풀어 오르고 또 빵빵하게 존재하는 모든 살집들을 불러들이고 세력을 양쪽 옆 배로 확장하고 또 분포하고 뱃살을 단단하게 결집시키고 소심하게 움츠려있던 온갖 지방들을 불러 모아 반란을 시작했으니, 여자의 뱃살은 어린 시절 뒷골목에서 구경하던 뻥튀기 기계처럼 당장이라도 주변의 모든 공기를 빨아들일 듯한 놀라운 기세로, 모든 원성과 원망과 분노를 내적으로 잠재우고, 그러다가도 다시 기운을 되살리며, 누군가 옆에서 살짝이라도 건드리기만 하면, 곧바로 전선 앞에 긴장한 채, 주둔해 있던 적들을 일망 타진하고야 말 거라는, 일촉즉발의 전투태세로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정말로, 강력하고도 지하철 천정이 무너질 듯한 무서운 폭발음이 들려왔다. 거짓말 안 하고 아줌마 옆 옆자리에 앉아있던 나를 비롯하여 그 옆의 수십 명의 사람들은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그야말로 옥수수 알갱이들이 일제히 한쪽으로 털려나가듯 순식간에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지하철 내부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돌변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일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원래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존재할 거라고 기대했던 영혼이 바깥으로 탈출해 버린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것은 뭐랄까 너무나 기묘했다. 지하철 구성원들, 그 순간에 동료였던 모두가 크게 놀라서, 정말이라도 지하철에서 폭탄 테러라도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을 만큼, 모두가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상해를 입었으리라고 짐작했으나, 그것은 예상한 것보다 요란하게 사건이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아줌마 앞에 그 젊은 여자가 큰 대자로 누워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래, 말 그대로 그 여자가 누워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여자인데 덩치는 여자의 것이 아니었다. 콧수염이 콧구멍 끝에서 휘날리며 다리에 털이 몇 가닥 나부끼는, 게다가 몸은 최홍만처럼 장대한 거인이라니!
그 여자, 아니 오디세우스에 나오는 폴리페모스 같은 그 여자의 정중앙 배에는 최홍만의 머리보다 더 큰 풍선이 간신히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풍선이 제 성질을 견디지 못하고 뻥튀기 터지듯 터져버려서 너무나 홀쭉해져 있었다. 요란스러운 그 여자의 목소리도, 배에 붙어 있던 기묘한 물건도, 원래 그 여자의 뱃살도 모두 홀쭉하게 너무나 보잘것없는 모양으로 움츠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 최홍만처럼 생긴 거인 여자에게서 터져나간 풍선은 그만 숙주를 집어삼키고 만 것이었다.
여자는 큰 대자로 누워 양 다리를 양쪽으로 휘휘 저어가면서 자신의 통증과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아픔인지, 수치스러움인지 분간하기는 곤란했다.
나는 눈을 감고 나머지 잠을 계속 청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 사건은 글감으로서의 제 역할을 해내긴 힘들 것 같았다. 다 그런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