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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y 22. 2023

자 게임을 시작하지?

초단편 소설

오랜만에 꿀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내 몸은 밧줄에 꽁꽁 묶인 상태였다. 마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주인공의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상황과 흡사했달까. 도무지 이런 일이 내 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앞에 앉은 수상쩍은 인물을 보고 금세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일어났군. 의외로 둔한 편인가 봐.”

“대체 무슨 일인가요? 당신은 누구고 나는 왜 의자에 이렇게 묶여 있는 건가요?” 몸부림을 하며 내가 물었다.

“이해할 필요는 없어. 현상은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돼”



남자는 이렇게 단문으로 대답하고 가죽 재킷의 안쪽으로 손을 슬며시 집어넣었다. 설마, 나는 권총이나 잭나이프라도 꺼낼까 싶어, '내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마감을 하는구나' 하고 공포스러웠지만 남자가 꺼낸 건 의외로 차가운 종이 한 장이었다.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그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2022.12.01


제목 : 고충 상담


저에게 무호흡 증상이 발견된 건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그 증상은 제 아내가 발견했죠. 물론 제 책상 앞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글을 쓰던 그 순간에 말입니다. 불행은 늘 예기치 않은 상황에 닥쳐오지 않습니까? 저에게도 불청객 같은 불행이 찾아오고야 만 것입니다. 아내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무호흡 증상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모르고 살다가 모른 채 편안하게 죽었겠죠. 수면 무호흡 증상은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글쓰기 무호흡이라는 건 아마 꽤 생소할 겁니다. 저에게도 그건 꽤 심각했으니까요. 글쓰기 무호흡이라는 건 말 그대로 글을 쓸 때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입니다. 저는 제 책상 앞에 앉습니다. 노트북 덮개를 열고 구상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글을 씁니다. 보통 오랫동안 생각한 후에, 그러니까 생각이 정리된 후에 글을 쓰게 되니까, 보통 글을 쓰면 중간에 쉬지 않고 마무리하는 편입니다. 한번 쓰기 시작하면 총부리를 관자놀이에 들이대도 그 사실조차 모르고 열심히 쓰기만 합니다. 완벽한 몰입 상태에 빠져드는 거죠. 엄청난 몰입 상태입니다. 심지어는 주변에 존재하는 사물조차 깔끔하게 지워버릴 정도니까요. 하지만 저는 쓰는 순간에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저를 유심히 관찰하기 전까지는요.


그런데 아내가 이야기해 준 사실을 듣고 나서 제가 정말로 숨을 쉬지 않고 글을 쓰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설마 한 거죠. 하지만 아내는 제가 글을 쓰는 도중에 실제로 제가 호흡을 어떻게 하는지 관찰을 했나 봅니다. 코끝에 손가락을 대보기까지 하면서요. 관찰하면서 기록해 보니까. 평균적으로 3분에서 5분 정도는 숨을 쉬지 않더라는 겁니다. 5분 동안 전혀 호흡을 하지 않은 거죠. 5분이 지나면 짧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5분 동안 숨을 쉬지 않습니다. 보통 짧은 단편 쓰는데 30분 정도 걸리는 셈이니까, 기껏해야 숨은 대여섯 번 정도 한다는 겁니다.


문제는 말입니다. 호흡은 뭐 물개처럼 한다고 칩시다.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글쓰기가 완전히 다른 모양새로 돌아섰다는 겁니다. 인식하지 않을 때는 숨을 쉬건 그렇지 않건 신경 쓸 일이 되지 않았는데, 무호흡 이야기를 들으니까 글을 쓸 때마다 자꾸만 숨을 억지로 쉬게 되더라는 겁니다. 호흡은 그냥 자율신경계에 맡겨버려야 하는데, 그게 안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지금쯤은 숨을 쉬어야 하지 않나?’ ‘이제 3분 정도 지나지 않았을까? 숨 한 번 쉬어주자고’ 이런 식으로 계속 신경을 쓰게 된 겁니다.


나중에는 스스로 그 병을 고쳐보고 싶어서 책을 펼쳐놓고 낭독을 해보기도 했어요. 낭독하면 자연스럽게 호흡 기능이 작동하지 않을까, 기대한 거죠. 그런데 오히려 더 호흡에 대한 갈망과 고통만 생기더군요. 그 여파로 저는 숨 쉬는 일이야 말로 이 산소가 가득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되고 말았어요. 숨 쉬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사는 과거의 저로 돌아갈 방법이 없을까요?


그런 사태가 벌어지게 되니 저는 글을 쓰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맞고 맙니다. 신경을 쓰게 되니까 온통 머릿속이 ‘호흡’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게 된 겁니다. 결국 저는 단 한 글자도 전개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어요. 제발 글을 쓰고 싶어요. 과거의 저로, 30분이면 3천 자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완성하던 저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 고충을 들어보시고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당신을 응원하는 찐팬이…





“난 이런 내용의 편지를 6개월 전에 보냈지. 넌 내 편지를 읽지도 않고 스팸 메일함으로 보내버렸고. 난 상처를 받았고 아무런 해결책의 실마리조차 받지 못했어. 완전히 무시를 당해버린 거야. 너는 아주 편안하게 글을 쓰면서 문단에서 거들먹거리기나 했어. 난 그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나는 글을 쓰지 못하는 인간이 됐는데, 너는 즐겁게 썼으니 공평하지 못한 거 아냐? 그게 너의 죄가 된 거야. 난 그래서 널 징벌하려고 여기에 왔지”


“자, 이제 우리 게임을 시작해 볼까? 물론 게임의 종류도 룰도 내가 선택하는 거지. 너는 게임에 참여만 하면 되는 거야”


남자는 자신의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주더니 등을 획 돌려 내 서재에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래 고충 상담인지 곤충 상담인지, 뭐 그런 편지가 도착했던 건 기억난다. 그런 독자의 편지란 건, 자세히 들여다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바쁜 사람이다, 일일이 저런 편지에 답장을 해주다가는 내 글 쓸 여건조차 확보하지 못한다. 딱히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고, 이런 글쓰기 무호흡이라니 그런 정신 나간 인간의 편지까지 다 읽어보고 답을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저 남자는 앙심을 품고 나타나 내 몸을 결박하고 협박까지 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영화 <쏘우>에 나오는 살인자라도 된 듯이 말이다.





“아하, 이 책이 여기 있었군 그래! 앙리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좋은 책이지, 나도 이 책은 몇 년 전에 완독 했었어. 좋은 책이지만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각설하고 게임에 대해 얘기해 주지. 간단해, 앙리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를 펼쳐놓고 서로 낭독을 하는 거야. 서로 번갈아가면서 말이야. 낭독을 하다가 잘못 읽는, 그러니까 말이 씹히거나 엉뚱하게 읽으면 차례가 바뀌는 거지. 내가 먼저 시작할 테니까, 그다음은 너야. 자 준비됐지?”


그리하여 남자는 <물질과 기억>의 1페이지를 펼쳐놓고 낭독을 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실수하면 그다음 부분은 내가 다시 읽고 또 내가 실수하면 그다음 부분부터 마치 바통이라도 이어받듯이, 사이좋게 주거니 받거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낭독을 주고받았다. 날이 샐 때까지 우리의 낭독의 밤은 계속 이어졌다. 물론 그 낭독은 <물질과 기억>의 마지막 페이지가 나타날 때까지였다.


왜 낭독을 해야 하고 낭독이 남자에게 기발한 무호흡 치료법이 될지는 몰랐다. 나는 묶인 신분이고 남자는 겁박하는 사람일 뿐이다. 우린 즐겁게 마치 실력 좋은 성우라도 된 것처럼 <물질과 기억> 낭독에 빠져들고 말았다. 의외로 낭독은 참 즐거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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