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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11. 2023

죽기 싫으면 써!

초단편 소설

(2,787자)


이곳의 규칙은 아주 간단하다. 하루 5만 자 분량의 에세이만 써서 기관에 제출하면 된다. 일단 머릿속의 생각을 짜내면 1차 관문은 그럭저럭 통과한다. 죽는 순간을 구질구질하지만 하루라도 유예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5만 자의 에세이와 죽음이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나는 줄곧 짧은 시만 쓰는 인간이었는데, 어찌 에세이를 쓰냐고, 누가 그런 몹쓸 규칙을 제정한 거냐고? 투덜거리며 따져봤자 소용없다. 나도 모른다. 게다가 너무 늦었다. 나도 이미 반은 죽은 신세인데, 이 차갑게 식어버린 몸뚱어리가 당신의 사정을 어찌 아랴. 닥치고 에세이나 쓰자!


누구나 5만 자의 에세이 정도는 써 내려갈 수 있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링 위에 올라 한 방 처맞기 전까지는…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몰랐다. 무지가 죄인 것이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몇 가지 규칙만 잘 지키면 된다.


그럴 재능도 끈기도 없다고? 그럼 여길 힐끗힐끗 곁눈질하지 말고 당당하게 가스실 앞으로 이동하자. 정신만 단디 차리면 꾸준함은 앞으로 자동으로 길러질 것이다.


그래, 이곳의 규칙은 말이다… 이를테면 동어 반복, 재미 따위는 없고 지루하기만 한 문장,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문장, 유치한 농담만 주고받는 문장, 뭐 이런 하찮은 문장 따위를 절대 생산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잘 아는 나쁜 습관 몇 가지만 조심하면 된다. 그리고 평소 버릇처럼 아무 말 대잔치 하듯 그렇게 5만 자만 훌쩍 넘어가면 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왼쪽 오른쪽! 위아래!


어떤 어리석은 녀석이 아래와 같은 얄팍한 수법으로 5만 자를 채우려다, 가스실에서 사린을 신속하게 흡입했다.


‘무슨 글을 써야 하지? 무슨 글을 써야 하지? 무슨 글을 써야 하지? …… (후략)’


하여튼 간, 분량을 채우지 못한다? 쓸 자신이 없다? 그럼 죽으면 된다. 에이, 장난인 것 같다고? 삶이 장난이야? 4만 9천 자 정도는 괜찮겠지? 설마? 당연 안되지. 죽음 급행열차 특석에 곧바로 앉게 된다. 6일 열심히 썼으니 하루는 안식일 삼아서 쉰다고?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바로 장기가 작동을 멈추기 시작한다. 일단 이곳에 들어온 이상, 100일을 버티지 못하면 당신에게 허락되는 건 오직 죽음뿐이다.


물론 나 역시 당신처럼 이 프로그램에 자의적으로 참여했다. 100일만 버텨내면 천만 원을 준다는데, 누가 그걸 마다할까. 뭐 매일매일 일기 블로거처럼 5만 자만 써 내려가면 되는 게 아닌가. 5만 자 분량 따위야 도넛 속에 구멍을 뚫고 생크림을 짜 넣는 것보다 더 쉬울 테니까. 문장이라는 건 그냥 모차렐라 치즈처럼 쭉쭉 늘어나도록 조치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패하면 죽음이 따른다는 건 몰랐다. 정말이다. 미안하게도 내가 무지했다. 누가 특약이다, 특별조항이다 이런 3포인트짜리 크기로 신청서 하단에 개미만 하게 쓴 글을 일일이 확인한단 말인가. 나는 그저 천만 원과 100일, 그리고 5만 자 분량의 에세이만 생각했을 뿐이다. 경솔함이 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오늘로서 작심삼일째다. 여기선 작심삼일 병이 자동으로 치유된다. 놀라운 치유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내일은 또 몇 명의 송장을 구경하게 되려나. 부디 내가 아니길 빌어본다.


이곳의 하루는…

하루키의 글쓰기 루틴과 꽤 비슷하다.


새벽 4시에 정확하게 기상한다. 토스트와 커피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후 곧바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정해진 시간은 12시까지다. 8시간이 주어진 셈인데, 1차적으로 5만 자를 채워야 한다.


그렇게 오전 일정이 끝나면 12시부터 2시까지 수영이나 조깅을 해야 한다. 왜냐고? 여기 기관장이 하루키를 좋아한다나? 아무튼 100일을 곰처럼 버텨내려면 체력이 필수라는 거다. 몸이 튼튼하지 않으면 글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


2시부터 9시까지는 기나긴 퇴고의 시간이다. 오전에 5만 자 에세이를 완벽하게 끝낸 사람이라면 절간 주변을 산책하거나 독서를 해도 좋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모자란 분량도 채우고 완성도도 높여야 한다. 왜 완성도를 높여야 하냐고? 그 이유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9시에 기관에 과제를 제출하면 하루가 마무리된다.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면 된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5만 자 에세이로만 상황이 끝났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다음날 9시가 되면 관계자는 우리가 작성한 글을 브런치에 업로드한다. 그리고 좋아요와 댓글 추이를 지켜본다. 하루 동안 수집한 ‘좋아요’와 ‘댓글’, ‘독자의 냉정한 비평’, ‘조회 수’, ‘공유 수’ 등을 환산해서 기관이 요구하는 점수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면 게임은 오버다. 즉 미션 실패! 파국을 맞는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소설 한 편 쓰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것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고 했지. 에세이라고 소설과 다를까? 무엇이든 꾸준하게 쓴다는 게 어쩌면 아침에 출근하는 일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평상시 나는 글을 쓰면서 그걸 우습게 생각했다. 글을 잘 쓰는 비결이 고작 꾸준함이란 말이야? 지속적으로 쓰는 게 그렇게 어렵단 말이야? 거짓말하지 말라고!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거듭하면서 매일 쓰는 사람을 무시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럼에도 작심삼일도 넘겼고 열흘도 넘겼으며 오십 일의 분수령도 넘겼고 구십일의 고비까지 넘겼다. 그래서 오늘로서 99일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스실로 보내졌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만 안 갔으면 다행이니까. 내일 밤이면 내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천만 원이냐! 죽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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