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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31. 2023

고독한 산책자 1/4

단편 소설

준영은 도시의 고독한 산책자다.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려는… 문제는 준영에게 어울리는 길을 무엇이고 어떻게 찾아야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준영은 아파트 주변을 배회하듯 매일 산책을 했다. 하지만 매일 형체 없는 관념의 세계를 숭배하는 철학자처럼, 그러니까 루소나 칸트처럼 무의식적인 재미를 추구할 뿐이다. 물론 루소처럼 무서운 개나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다행히 여기 주택가 산책길엔 흔한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길엔 온통 무위의 세계만이 가득 널려 있다.


‘나는 지금 왜 산책을 하고 있는 거야?’


어쩌면 준영은 누군가의 관람 대상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집을 나서는 순간 칸트처럼 ‘아, 이제 막 정오가 되었구나’,라는 사실을 전달해 주는 그런 형식의 결정체인 것이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백수인 준영으로서는 이 소박한 행사가 자신의 뇌세포 속에 긍정적인 의미를 각인시켜 줄 테니까.


자신의 차림새를 보니 스스로도 한심스러울 뿐이다. 빛바랜 청색 아디다스 커프 운동복에 목이 가슴 부근까지 축 늘어진 힘없는 티셔츠, 그게 전부다. 그 옷이 준영이라는 존재를 확연히 드러낸다. 준영은 산책에 나설 때마다 이 복장을 집요하게 고집했다,라고 쓰고 싶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옷이 전부일 뿐이야’라고 실토한다. 이 낡은 운동복은 준영의 인생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주머니 속엔 8번 곱게 접은 5만 원 권이 자랑스럽게, 아니 치욕스러운 자태로 누워있다. 그 종이 쪼가리엔 근엄한 표정의 여자가 준영에게 삿대질을 하는 듯하다.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놓고 허벅지를 긁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 보잘것없는 주머니 안쪽에는 5만 원 권이 고대의 물고기 화석처럼 숨도 쉬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대체 누구를 위해?


준영은 배가 몹시 고프다. 며칠을 굶었으니까. 준영은 빵 부스러기조차 통 먹지 못했다. 다만 준영에겐 5만 원이 있다. 하지만 이 돈은 배고픈 요소에 사용될 수 없다. 그것은 준영에게 몇 남지 않은 암묵적 규칙이다. 준영에겐 뭔가 문화적으로 세련된 치장을 한 어떤 예술적인 가치에 돈을 쓸 필요가 있다. 돈은 함부로 쓸 수 없다. 한걸음 내밀 때마다 배고픔은 뱃살과 등살 사이에서 교태를 부렸다. 아니, 탭 댄스를 췄다. 몸부림의 댄스, 발악의 스텝이다. 드뷔시의 달빛 같은 향유는 여기서 찾을 수 없다.


산책길엔 몇 채의 집들이 마치 빈 옥수수 알갱이처럼 늘어서 있다. 아파트가 아닌 일반적으로 주택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그 안에 누가 사는지 준영은 본 적이 없다. 관심도 없다. 그깟 성냥갑처럼 생긴 무색무취의 공간들, 누군가 제멋대로 살아갈 것이 아닌가. 특징 없는 잿빛으로 물든 가옥 사이를 지나가면 빨간 벽돌로 중무장 한 집 한 채가 늘 나타났다. 산책이 거의 끝나간다는 신호였다. 오늘은 그 집 앞에서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그곳을 관찰했다.


‘파리스 레스토랑’


“파리스라고? 그 멍청한 녀석 파리스? 언제 이런 빌어먹을 녀석이 여기에 있었던 거야.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준영은 스마트폰을 켜고 지도앱을 실행했다. 그리고 ‘파리스 레스토랑’을 검색했다. 방문자 리뷰 3, 블로그 리뷰 1. 조촐했다. 취급하는 메뉴는… 없다. 깨끗한 여백이다. 방문자 리뷰도 블로그 리뷰도 10년 전 것뿐이다. 도대체 이 레스토랑은 무엇을 취급하는 곳일까. 의심스럽기만 하다.


준영은 속으로 트로이를 멸망시킨 파리스에 대해 생각했다. 세 여신 앞에서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준, 아테네의 헬레네를 데리고 도망친, 트로이를 몰락시킨 장본인 파리스를 떠올렸다. 준영의 발걸음은 보도블록 위에 멈춰 섰다. 준영은 파리스 레스토랑이라는 금색으로 도장된 사각형, 그 사각형 안에 돋을새김 된 금빛 인장과 그것을 둘러싼 빨간색 벽돌들을 바라봤다. 초록색 덩굴이 촘촘하게 뒤덮은 빨간색 담장에 새겨진 미적 조화를 감상했다. 마치 예술에 조예가 부족해서 오래도록 외면해 온 작품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그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린 감상자처럼 준영의 몸은 순간 작동을 멎어버린 것 같다.


사실 그곳은 레스토랑이기보다는 비밀 첩보원들이 드나드는 비밀 안가(安家)처럼 생겼다. 이런 주택가라면 충분히 그 가설은 설득력이 있다. 음, 궁금증은 풀려야 한다. 게다가 산책 중에 맛볼 수 있는 재미는 이런 예측 불가능한 지점으로 휘말리는 것이 아닌가. 얼어붙은 두 다리를 독려하며 준영은 그 카페인지 안가인지 하는 곳으로 들어가 보기로 작정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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