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04. 2016

헤르쯔 아날로그의 '여름밤'

어린 시절의 소중한 여름날을 추억하며...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방학이 막 시작될 무렵이면 나를 들뜨게 하는 일정이 늘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부풀었던 꿈을 외갓집 뒤편의 높디높았던 버드나무 어느 한 가지에, 신문지로 감싸있는 먹음직스러운 배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할아버지의 배나무에, 온갖 무덤들이 즐비했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던 마을 뒷동산에, 무성한 이름 모를 풀들이 마치 잔디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연녹색 빛깔의 광활한 들판에, 무엇보다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너른 외갓집의 마루에 남겨두었다가 다시 찾아가곤 했었다. 



방학이면 나는 도시 아이에서 잠시 벗어나 한 달 동안 시골아이처럼 산과 들에서 시간을 하릴없이 축내며, 실컷 놀 수 있다는 기대감에 흠뻑 젖었었다. 나는 떠나기 일주일 전부터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날짜를 세어가며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목놓아 기다렸다. 아버지는 나와 여동생을 데리고 버스를 주로 이용했다. 연신내에서 출발했던 버스는 청량리에 잠깐 내렸다가, 그곳 청과물 시장에서 과일을 구입한 후, 다시 다른 버스를 갈아타고 외갓집을 향했다. 





나는 시장에서 에누리하는 아버지의 단호한 어조를 기억한다. 외갓집을 향했던 순간의 기억들 중에서 유난히 내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은 아버지의 단호한 음성이었다. 그 음성은 너무나 철저하고 당신의 자존심이 무너질지언정, 단 한 푼이라도 과일가게 아저씨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냉혹한 삶의 현장인 것이어서, 나는 냉정하기만 한 아버지의 모습과는 대조로, 내 머릿속으로 꿈꿨던 외갓집 뒷동산의 푸르렀던 대지와 푸근한 시골의 인심을 대하는 모순된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버스는 그렇게 우리 가족을 태우고 뒷문의 안내양까지 대동했던 오랜 역사를 안은 채, 비포장 도로를 한없이 달렸고, 결국 도시를 벗어난 서울 외곽의 한적한 시골을 향했다. 외딴 마을의 형체는 분명 시골이었지만, 그곳은 위치상 시골은 아니었다. 행정 구역상 분명히 서울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근처에 군부대가 있는 관계로 개발이 제한되어 마을은 도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은 요즘 한참 개발되어 아파트가 무성하게 들어선, 그 시절 배나무 밭이 그렇게 무성하도록 즐비했던 '신내동'이라는 곳이었다.



'17번 버스'가 신내동 버스 종점으로 접어들면, 나의 기대감은 최고조로 증폭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외갓집을 가려면 반드시 거쳐가야 할 코스가 하나 있었다. 종점에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산 비탈길을 넘어가면, 마을의 공동묘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위가 정점으로 무르익었던 시골의 뙤약볕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한 여름 낮,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는 나의 오른쪽엔 조그마한 실개천 하나가 시원하게 한 곳을 향해 쭈욱 이어져있었고, 그 길을 따라 왼편에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작은 배나무 밭이 기다랗게 놓여 있었다. 배나무의 어떤 가지는 탈출의 본능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철조망 사이로 슬며시 부끄러운 얼굴을 내밀기도 하였다.  





그렇게 잠시 걷다 보면 마을의 공동묘지가 들어선 뒷산과 그 옆에 놓인 작은 들판이 나타났다. 좁은 길을 흐느적 걷느라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기 때문에 풀밭 옆에 잠시 자리를 깔고 앉아 어깨를 누이곤 했다. 풀밭에 엉덩이를 잠시 붙이고 앉아있으면 어디선가 한들한들한 여름 바람이 마치 은은한 멜로디의 향기처럼 우리 가족을 맞이했다. 바람은 언덕 너머의 높은 산등성이를 타고 날아오는 것인지, 멀리 보이는 논과 밭을 가로질러 오는 것인지, 그 규모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송글송글 맺혀있던 땀을 싹 가시게 할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나에게 주변의 묘지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 녹색과 연두색의 자연스러운 협력으로서 기억될 뿐이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본 채 누워있으면, 시골의 정겨운 소리가 바람을 타고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바람에 취하고 녹색의 풀들이 너울거리는 물결에 취할 무렵, 여치와 메뚜기는 박자를 맞추는 듯, 경쟁하 듯 찌르르 찌르르 울어댔고, 메미는 이제 막 단단한 땅을 비집고 나무에 겨우 올라서 그곳에 척 달라붙은 채, 맴맴 서러운 울음을 울어댔고, 논 옆에 붙어있던 작은 늪에서 우렁차게 울어대던 맹꽁이와 청개구리는 서로의 목청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그렇게 멈춘듯했다. 아버지는 현실을 잊고 싶은 사람처럼 먼 곳을 향하곤 이내 초점을 잃은 채, 무심히 알 수 없는 곳을 응시했고, 나는 그때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떻게 자리를 잡게 될까?라며 보이지 않는 미래의 내 모습을 홀로 떠올렸다. 지금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그때의 내가 간직했던 시간도 무심히 흘러갔고, 환했던 여름의 오후는 서늘한 시골의 저녁으로, 다시 넉넉한 밤으로 치닫고 있었다. 지금 나는 그때의, 너른 들판에 취해 시간을 잊고 있었던 작은 '나'와 너무나 훌쩍 커버린 현재의 '나'를 이어간다.



나는 여름이면 항상 들판에 앉아 세상을 조망했던 그때의 철없던 나를 떠올린다. 그리고 멍하게 시간을 보내다, 어느덧 저녁과 밤을 맞이했던 우리 가족의 단란했던 하루를 더듬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시간을 잊을 수 있었던 시골의 여름 낮부터 여름밤까지의 짧았던 시절을 떠올린다. 



그 시절은 나에게 무엇이었고, 어떤 의미였을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어떤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있을까?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그때의 산도, 들판도, 나무도, 풀들도, 풀벌레도, 아버지도 모두 사라졌을 테니... 지금은 하나의 장면으로 추억하는 그때의 소중한 것들을 글로 다시 되살려 본다. 그리고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헤르쯔 아날로그>의 '여름밤'이라는 노래를 덧붙여 본다.



헤르쯔 아날로그 - 여름밤


뜨겁던 해는 지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여름밤
어둠으로 물든 하늘엔
식은 공기만 있어

풀벌레 우는 소리
그네에 앉아 듣는
여름밤
그늘이란 없는 따가운
햇살 같던 나의 일상

긴 오후가 가 버리고
하루의 끝자락에 있지만
가로등 불빛 아래서
나의 하루를 아직
끝내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어

부드러운 바람이 불면
슬며시 눈을 감아
무더웠던 나의 하루를
어루만져주는 여름밤

향기로운 바람이 불면
살며시 미소를 지어
무더웠던 나의 하루를
어루만져주는 여름밤

부드러운 바람이 불면
슬며시 눈을 감아
무더웠던 나의 하루를
어루만져주는 여름밤

향기로운 바람이 불면
살며시 미소를 지어
무더웠던 나의 하루를
어루만져주는 여름밤 






페이스북 
네이버 블로그
브런치


나에게 글쓰기란?



매거진의 이전글 Klazz Brothers&Cuba Percussio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