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크 조던에게 낭만의 감각을 살려준 덴마크
https://www.youtube.com/watch?v=KIQVjK13PzI
여름에 듣는 "듀크 조던"은 은밀한 새벽에 나의 귓가를 어지럽히고 떠나는, 갈 길 바쁜 바람의 행보처럼 새롭다. 그 바람 속에 낯선 이방인이 한 명 서있다. 이방인의 남루한 행색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초라한 과거 속에 서린, 서글픈 젊은 날의 빛바랜 흑백사진과 같은 역사를 느낀다. 이방인에게는 숨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영롱히 빛나는 과거의 영광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과거의 기억을 억지로 지우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그의 빛나는 시절이 대조적인 어두운 그림자에서부터 출발했다.
이방인이 차려입은 검은색의 낡은 가죽 재킷을 훑어본다. 낡은 가죽 재킷의 단추는 목 아래쪽부터 허벅지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동안 단정하고도 일정한 비율로 곱게 채워져 있다. 검은색의 또 다른 구겨진 바지와 너덜한 구두를 맞춰 입은 이방인은 두꺼운 뿔테 안경으로 검은색의 구도를 잡았다. 마치 그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자신을 옭아맨 어떤 매듭을 풀기 위해 이승을 찾은 미련이 깊은 영혼처럼 보였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으나 미소를 잃지 않았고, 목석처럼 미동조차 없이 낮은 발걸음만을 차분하게 유지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나지막이 혼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던 그는, 잠시 후 아무 말없이 오래된 CD 한 장을 내 손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나의 눈길을 피하려는 그에게 시야를 허락하려는 순간, 그는 이미 물거품처럼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나는 넋을 놓고, 주위를 잠시 둘러보다 묵직한 무게가 전해지는 앨범 한 장에게 눈길을 돌렸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야릇한 기억을 뒤로한 채, 낯선 이방인이 전해준 앨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듀크 조던의 <Flight to Denmark> 앨범이었다. 십수 년 전의 기억이 오늘 벌어졌던 일들처럼 새록새록 돋아났다. 재즈에 처음 입문할 때였다. 수많은 재즈 레이블 중에서 어떤 장르, 어떤 뮤지션을 먼저 개척해야 할지 난감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누군가 나에게 추천을 해준, 나에게 있어서 첫 번째 재즈 앨범이었다.
그렇다! 내가 듀크 조던을 만난 건 십 년도 훨씬 지난, 이제는 기억 속에서도 희미한 옛 과거의 어느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말없이 다가와 앨범 한 장 슬며시 던져주고 떠난 생면부지의 사람이 바로 듀크 조던이었단 말인가?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현실 너머의 사람이 아닌가? 나는 이미 지나간 사람의 옛 환영을 목도한 것이고, 그 환영은 옅은 잠에 시름하던 나의 부유스름한 새벽을 덮친 것이다.
잠시 스쳐 지나갔던 회상의 순간을 더듬는다. 듀크 조던은 뉴욕에서 1922년에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피아노 연주에 두각을 나타냈다. 1947년부터 48년 까지는 찰리 파커 퀸텟의 정규 멤버로 활약하기도 했고, 마일스 데이비스에서 피처링을 담당하기도 했다. 1950년대까지는 솔로로 활동을 했지만, 대중에게 특별한 인기를 끌지는 못 했다. 결국 1960년대에는 택시 드라이버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1973년도에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덴마크를 향하여 그의 새로운 재즈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그의 고향 미국에 재즈의 오래된 기억을 묻어두고 덴마크에 도착한다. 그는 자신의 재즈 인생에 있어서 두 번째 책장을 넘기는 중대한 기로에 선다. 떠나야 할 때는 말없이 이전의 기억들을 잊어야 한다. 불쑥불쑥 떠오르는 과거의 흔적을 모두 지워야 한다. 그의 버둥거리는 현실이 음악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새롭게 차오르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담아 미래로 천천히 나아가는 그의 무쇠와 같은 내면이 보인다. 그에 마음에 새로운 불덩어리를 안긴 것들을 진정시키려는 듯한 침착한 피아노의 연주 광경이 보인다.
플레이어를 오래간만에 구동시킨다. 디지털 음원에 길들여졌던 나의 닫혀있던 귀가, 범상치 않은 음악이 문지르는 촉감에 다시 시큼한 반응을 한다.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다시 끈적하게 태어나고 나의 귓속에서 재조합을 한다. 먼저 <No Problem>을 듣는다. 선명하지 않았던 첼로와 퍼커션의 느린 진행이 가지런하게 나의 시선 앞으로 정렬한다. 피아노는 첼로의 뒤를 이어 나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낯선 이국 땅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고즈넉한 감정이 나에게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그의 음악을 듣는 이 순간, 나는 덴마크에 서있는 그와 감정을 깊이 공유하며 잠시 같은 세상을 눈앞에 펼쳐 나간다.
그는 두려웠을 것이다, 덴마크란 땅이 그에게 기회가 될지, 더 처절한 실패를 맛보게 될지, 그는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그의 음악이 남겨준 인생의 유산을 쏟아부어야 했을 터, 잠시 그는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마저 걷어치워야 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혼자에게 수없이 되뇌었을 다짐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No Problem......' '아무 걱정하지 마'가 아니었을까?
그렇다! 그는 자신에게 수없이 'No Problem'이라고 안심시켰을지도 모른다. 눈 덮인 어느 숲 속 길을 아무 걱정 없이 걷고 있는 듀크 조던의 검은 모습이 다시 보인다. 흰색의 배경 속에 우두커니 서있는 그의 모습이 맑다. 덴마크는 그에게 어둑어둑한 미래였을까? 아니면 하얀 눈 속에 서있는 그의 존재를 더 환하게 비쳐주는 빛이었을까? 서글프게 흘러내리는 여린 눈 꽃의 향기와 같은 듀크 조던의 피아노는 내 귓가에 오래도록 머문다. <Here's That Rainy Day>는 그의 덴마크에서의 첫 출발을 솔직하게 써 내려간 일기장 같은 느낌이다. 그가 이 곡을 작곡한 날은 비 오는 촉촉한 덴마크였을까? 아니면 눈 속에서도 비 오는 광경을 마음속에 그리며 또 다른 세상을 떠올린 것일까?
<Everything Happens to Me> 그래...... 모든 일은 이미 그에게 일어난 명확한 사실이다. 그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새로운 출발을 마음에 다져야 한다. 앞으로 덴마크에서의 미래가 조금은 더 그의 인생을 분명히 변화시킬지도 모른다. '괜찮을 거야' '이미 모든 일들은 벌어졌잖아'라고 미래를 유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의 차분한 피아노의 선율 앞에서 나를 가로막았던 무더위는 무너진다. 숲 속에 쌓인 눈을 가지런하게 쓰는 듯한 친절한, 그의 자박자박한 걸음걸이가 느껴진다. 빈자리에 다시 쌓이는 눈의 묵묵함이 나의 마음을 너풀너풀 공중으로 부양시킨다. <Glad I Met Pat [Take 3]> 와 함께 나의 내면은 사뿐히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스르르 내려앉는다. 마음은 고양되었다가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깨끗하고 맑은 피아노의 촉촉한 이끌림에 몸을 의지한다. 축축하게 내 목가를 간지럽혔던 땀이 수증기로 물들어가며 공중으로 이내 분해된다.
설원에 서있는 그의 고독한 모습이 다시 보인다. 가득한 눈의 세상에서 그는 미래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는 덴마크로 날아갔다. 그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낭만적인 일상을 매일 보냈을까? 그는 덴마크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다. 덴마크는 미국보다 더 큼지막한 사랑을 그에게 안겼다. 아마도 행복한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삶을 보냈을 것이다. 택시 드라이버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지난날은 더 이상 떠올리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덴마크는 듀크 조던에게 낭만의 감각을 다시 살려준 제2의 고향이다.
이제 마지막 그의 연주 <Jordu>가 시작된다. 그와 함께 했던 여정도 끝나가고 있다. 이 곡은 그가 뉴욕에서 연주했던 과거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연상시킨다. 피아노의 경쾌한 발걸음은 마치 뉴욕을 이미 잊은 듯한 덴마코에서의 새로운 일상을 엿보게 한다. <Flight to Denmark> 앨범은 단순히 덴마크에서의 새롭게 그가 시작한 재즈 역사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그는 이 앨범을 통해서 오래도록 하고 싶었던 이야기, 자신만의 꿈을 담았다. 그 꿈을 지원한 덴마크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느 날
그가 날아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의 존재는
기억에서 희미하지만,
맑은 연주는 귓가에 여전하다.
오늘 새벽엔
설원을 걷고 있는 그의 발자국이
그의 차분한 연주가 더 절실했다.
먼지에 쌓인
남루한 앨범 더미를 뒤적거리다
눈 덮인 그의 덴마크를 발견한다.
여전한 그의 가죽 재킷
여전한 그의 눈 덮인 덴마크
여전한 그의 피아노
예전처럼 조심스레
플레이어에
앨범을 얹는다
따뜻하게
다시 살아나는
그의 눈 덮인 설원
73년의 덴마크
달달한 와인 한 잔이 그리운
그의 피아노
어제는 별들의 마지막 운명을 기념하는 쇼 - 유성우 - 가 펼쳐졌다고 한다. 밤하늘에 빛나는 청춘의 별들도 언젠가는 자신의 자리를 잃는다. 언젠가 유명을 달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주에 놓여있는 모든 외로운 존재들이 저어갈 미래다. 주말 아침 나는 73년의 오래된 재즈에 빠졌다. 덴마크에서 새 삶을 시작했던 별처럼 반짝거리던 듀크 조던을 만났다. 그리고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피아노의 연주 앞에서 호사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혜성처럼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은밀히 찾아왔다가 일순간에 빛을 내고 사라지는 마지막 유성처럼 아름다웠고, 밤하늘에 마지막 찬란한 빛을 내고 아득히 먼 세상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