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r 01. 2017

나는 누구인가?

나는 작가로서 행복해지고 싶다. 그 운명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 싶다.

"나는 누구인가?"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질문을 던졌다. '진정 나는 누구란 말인가?' 마음속엔 희미한 안개만이 자욱했다. 길을 헤매다 돌아온 빈 메아리만이 질문 위에 포개졌다. 마음을 통제하는 주인은 내가 맞을까? 나는 매일 남에게 휘둘리는데…… 남의 의견에 힘 없이 위축되고 마는데…… 주체의식이 분명하지 않은 나는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의지대로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인지 자신 있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 난해한 질문에 내가 내놓은 첫 번째 해답은 다음과 같다."


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자다. 가난했으나 헌신적인 부모님 덕분에 무난한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프로그래머로 일을 시작했고 현재까지 관련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아내와 19년째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리고 있다.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지만 숱한 고비도 있었다. 어느 누구의 인생에 굴곡이 없을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이 어디 나뿐일까? 비극적인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잃었던 방향을 찾았다. 감각을 상실했던 진정한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어느 것보다 찾고 싶었던 나는 '글 쓰는 사람'이었다. 사람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주고받던 흔한 명함. 그 볼품없는 명함 한구석에 '작가' 또는 '글 쓰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선명하게 새기고 싶었다. '이사' 혹은 '프로그래머'라는 타이틀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얼굴 같았다.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세속적인 가면이었다. 명함을 교환하는 손이 부끄러웠고, 당당하게 글 쓰는 사람이라 말하지 못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나의 마음을 그린다."


나의 정체성을 놓고 마음과 밀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 마음을 제대로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경과됐다. 이렇다, 저렇다 단적으로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마음이 전하는 나의 본질은 내성적이면서도 외향적이었고, 즉흥적이면서도 분석적이었고, 논리적이면서도 감정적이었고, 소심하면서도 과감했고, 음울하면서도 활기찼다. 나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냉정하다. 무표정하다. 결정을 잘 못한다. 겁이 많다. 멘틀이 약하다."


위의 표현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모르는 상태에서, 겉모습만으로 흔히 결정하는 문장이었다. 사람들이 위의 말을 직설적으로 내밀었을 때 마음이 쳐졌다. 과거, 자존감이 추락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생 시절, 필리핀에 단기 선교 봉사를 떠났었다. 몇 주가 지나간 무더운 필리핀의 마지막 밤, 한 친구가 나에게 무심코 건넨 말이 아직까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 친구가 나에게 건넨 한 마디는 작은 상처에서 트라우마가 되었고, 감정을 바닥으로 추락하게 만들었다.


"선배는 표정이 없어요…… 왜 그렇게 자신을 감춰요?"


알고는 있어도,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이 있다. 그 당시에 나는 영적으로 어렸고 사람들과의 소통에 서툴렀다. 불쾌한 감정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냈다. 내 얼굴은 검붉게 노여움으로 가득 찼고, 분노를 감추기 위해 어디로든 숨으려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지향하는 모습과는 상관없이 계속 반대의 얼굴이 도드라졌다. 부끄러움이 얼굴에 그대로 반영이 되었고 통제할 수도 없었다. 



"세월은 흐르고"


또 나를 찾았다. 세월은 흘렀고 나는 더 종잡을 수 없이 복잡한 존재가 되었다. 도대체 나라는 인간의 진정성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 문제를 놓고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봐도 명료한 결론은 없다. 결국 나는 페르소나 - 가면 - 를 뒤집어쓴 채, 상황에 맞는 최적의 옷을 갈아입으며 산다. 그것이 현재 나의 결론이다. 정해진 외모, 정해진 성격은 없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는 사회에서 나는 상황에 어울리는 또 다른 '진정한 나'로 살아간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나란 무엇인가?>에서 '나'의 외면을 물질적으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위, 즉 개인으로 규정한다. 물질적인 단위로서의 나는 외면을 변화시킬 수 없다. 하지만 나의 내면은 여러 갈래로 나뉠 수 있다. 물리적인 개체로서의 개인은 더 이상 세부 단위로 분화할 수 없지만, 분인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또 다른 내면을 설명하고 있다.


외면은 바꿀 수 없지만 내면은 언제든 바뀐다. 끊임없이 다른 '진정한 나'를 생산한다. 글을 쓰며 새롭게 부상한 또 다른 '진정한 나'가 나타났다. 나는 다채로운 무대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가면을 쓰고 관객들이 즐거워하도록 맞춤 연기들을 펼치고 있다. 나의 내면은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서 예측 불가능한 변화의 추세를 보인다. '나'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완전체의 모습을 갖춰나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철학적인 대답을 원한다.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결국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을 먼저 분석해야 한다. 나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각각 어울리는 독립적인 실체를 들이댄다. 그중에서 '진정한 나'는 없다. 내 안의 모든 존재가 '진정한 나'의 모습을 상징한다. 


다양한 형태의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때로 요구한다. 나는 혼자 있을 때 내적 가치를 발견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서 다양한 내면이 소모한 에너지를 다시 회복한다. 조용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주말엔 책상 앞에 앉아 브런치에서 소통하며 소모한 나를 다시 채운다. 이것 또한 또 다른 형태의 '나'다.


현재 나는 직업으로서의 작가는 아니다. 나의 직업은 프로그래머다. 글쓰기 자체는 아직 생존 수단이 될 수 없다. 글쓰기와 삶을 어떻게 밀착시킬 수 있을까. 그것을 열심히 찾는 중이다. 프로그래머에게도 글쓰기는 중요할까? 내 경험으로는 중요했다. 내 의견을 남에게 피력하고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잘 써야 했다. 프로그래밍을 사랑하지만, 앞으로는 글쓰기를 더욱 사랑할 것 같다. 현재 내가 사랑하는 분인은 '글 쓰는 사람', '작가'다. 


나는 지금 작가로서 행복해지고 싶다. 작가의 운명으로 한 번 뛰어들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WRITER'S BLOCK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