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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다 : 조급증

조금은 여유롭게 그리고 느리게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이사한 지 몇 주간이 지나가고 있다.
아직까지 정리하지 못한 짐들이 너저분하게 쌓여있는 걸 보면서도
느긋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걸 보니 나에게도 빈틈이 조금은 생겼나 보다.

세상사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얘기하지만
그 이론이 내 현실이 된다고 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조급한 생각에서 떠난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지는 몰랐다.

조금은 여유롭게 생각하고 느리게 결정하고 싶지만,
어딘가에 붙들려 있는 내 신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직장과 가정'을 분리하려 애쓴다.
멀리서 볼 때 두 가지의 삶이 착착 박자를 맞추고 있을지라도
가까이서 볼 때는 서로를 멀리 떨어뜨려야 한다.
한쪽은 극심한 스트레스, 피로, 걱정이 가득 차있어도 버틸 수밖에 없는 삶이지만
반대쪽은 휴식, 평화, 행복이 있어서 가랑비 같은 잔잔한 삶이 된다.
두 가지가 함께 할 수 있다면 그 그림이야말로
인간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환경이겠지만
미안하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가정에서나마 은은한 삶을 꿈꾼다.

늦은 퇴근길,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할 때
나는 조급한 생각을 벗는다.
메마른 세상에서 빠져나오니 생각이 맑아지는 것 같다.
가끔은 하늘보다는 땅을 쳐다보는데,
누군가가 스쳐가다 남긴 그림자 하나하나가
마치 시냇물에 떠있는 작은 징검다리처럼 보인다.
흘러흘러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헤쳐가면서도
보드라움을 잃지 않는 물살과
꿋꿋하게 버티고 서 있는 조약돌의 의지가 서로 교차한다.
우리는 가끔 시냇물이기도 하고 조약돌이기도 하다.
유연하게 미끄러지듯 흘러갈 줄도 알아야 하지만,
때로는 든든하게 지조를 지킬 줄도 알아야 하겠지.

"졸졸졸……"

얼마나 걸었을까.
빛이 휘어지는 길모퉁이 어디선가
낯선 풍경이 속삭이듯 잔 물결을 일으킨다.
깊어가는 밤공기의 고즈넉한 양만큼의 물줄기가
조곤조곤 흘러내리는 것을 본다.



달빛이 내리는 어스름한 광선과
어느 아파트 거실에서 새어 나오는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만들어내는 최상의 조합을 만든다.
나는 다급하게 이어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요한 시냇물의 소나타에 잠긴다.
내 시간은 이곳에서 잠시 작동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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