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아닌 둘이서 무엇이든 같이 할 수 있기에 산다.
오랜만에 아내와 저녁을 맞는다. 오늘만큼은 하숙생에서 다정한 남편으로 신분을 되찾는다. 소파에 어깨를 기대고 따스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하루 동안 쌓였던 그리움을 술술 풀어 헤쳐본다. 그렇게 못다 한 이야기들이 수북하게 쌓여갈 때쯤, 엉뚱한 질문 하나를 슬쩍 던진다. 짧지만 모든 것을 품은 그런 난데없는 질문 말이다.
"우린 무슨 재미로 사는 걸까? 너무 힘들어서 그런가? 요즘은 무슨 일이든지 금방 싫증이 나고 재미도 없네……"
"글쎄…… 산다는 건 재미도 있어야겠지만 슬픔이나 좌절도 있기에 이런 평범한 시간도
감사하게 되고 재미도 찾게 되는 건 아닐까?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라서 힘들 때도 감싸주고 위로해줄 수 있잖아.
혼자서 숙제들을 떠안으려 하지 말고 가끔이라도 문제를 같이 풀었으면 좋겠어. 요즘 많이 힘들었지?"
명치끝에 끼어 있었던 안개가 걷히는 걸까. 밑바닥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긴장한 내 어깨를 감싸 안는다. 아내의 몇 마디는 내가 들었던 언어 중에서 가장 시원한…… 마치 팥빙수와 같은 대답이었다. 나는 거대한 블랙홀 같은 소용돌이 속으로 끝없이 쓸려 내려가다, 아내의 한 마디에 송두리째 끌어올려진다.
아내의 대답이 내 가슴으로 스며드는 순간, 굳은 표정은 일순간에 허물어지고 울분이 가득 찼던 하루마저도 철썩 달라붙어있다가 힘을 잃고 바닥에 툭 떨어진다.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진동하며 박차를 맞추고 나니 밤 하늘도 차분한 연주로 화답한다. 머릿속에서는 세상의 모든 부담감, 책임감, 의무감 무거운 단어들이 튀어나와 맴돌다 자취를 감춘다. 세상을 혼자 헤쳐나가겠다는 몹쓸 의지도 사라진다.
각자의 인생에서 서로는 어떤 존재일지 그 의미를 다시 새겨본다.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질문에 대답을 내밀만큼 나는 아내가 편히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일까. 나는 어떤 사람의 형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을까. 아내는 퀴즈 프로그램의 또랑또랑한 학생처럼 맑은 대답을 했다. 그 대답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남편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때로 혼자서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고 믿어 왔다. 아내는, 부부란 서로 벗 삼아 끌어주고 밀어주는 것이며 고통조차 함께 나누는 것임을 일깨워 준 것이다.
평생 내 눈앞에서 소녀일 것만 같던, 한없이 약하고 보호해야만 할 것 같던 아내에게도 바다와 같은 가슴이 있다. 내 심장에서는 감격스러움이 솟구친다. 비릿한 하루 때문이었을까. 미각을 잃어버린 것 같았지만, 아내의 포근한 한 마디에 추락하던 내 감각이 살아난다. 내일 아침에도 긴 잠에서 깨었을 때, 혼자가 아닌, 함께 할 수 있어서 더 감사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내가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묻는다면? 아내와 함께 있기 때문에, 혼자가 아닌 둘이서 무엇이든 같이 할 수 있기에 산다고 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