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그저 스쳐 지나갈 평범한 일상
언제인지 기억조차 희미한 어느 해 어느 날이었다. 외근을 나갈 때 가끔 지하철을 이용하는 편인데 그날도 새로 개발한 제품을 소개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무심코 드나들던 역사와는 느낌이 달라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봄이 왔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두 손을 주머니 깊숙이 감춰두었고 눈길을 계단에 의지한 채,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역사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마치 수용소에서 탈출한 듯한 기분이 들었고, 나는 맞은편 사람들과 서로 다른 세상 속으로 단절된 착각이 들었다. 낯선 무리를 무표정하게 쳐다보며 내 갈 길로 떠났다.
운 좋게도 플랫폼에 들어서자마자 지하철이 도착했다. 빈자리에 겨우 앉은 나는 창밖의 풍경을 잠시 살폈고 제각각 다른 표정으로 장식한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서 내 눈과 귀는 외부의 세계로 열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특별한 재미이자 취미였다. 대낮부터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켠 똑같은 등산복을 입은 아저씨들과 아주머니들이 이 시간의 주요 손님들이었다. 가끔씩 피곤한 삶을 막 시작한 청춘들도 눈에 뜨였다.
다음 역에 도착하자, 지하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사꾼이 승차를 했다. 물건을 내려놓고 한참을 설명하는데, 귀로 흘러 들어오는 소리를 거부하고 과거의 한 장면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그래 15년 정도쯤 되었구나……”
저 멀리 사라진 기억으로 시간을 잠시 되돌렸다. 과거, 3호선을 자주 이용할 때마다 특정 칸을 고집하곤 했는데, 우연히 마주치며 내 이목을 끌던 노인 판매상이 있었다.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었던 그 노인은 정중하고도 친절한 말솜씨로 고객들에게 상품을 설명했다. 노인은 마치 교향악단의 베테랑 지휘자처럼 능숙해 보였다. 노인은 잡스러운 물건을 팔고 있었지만, 직업에 대한 당당함과 자신만의 판매 철학이 있었다. 그것은 나이에 대한 품위, 자부심에서 출발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마치, '감동적인 한 편의 짧은 연설'을 듣는 느낌이라고 할까?' 점잖은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차분차분 설명을 하는 것 같았다. 굳이 물건을 사지 않아도 노인의 인생에는 별문제가 안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노인은 자신이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무척 행복해 보였다. 노인에겐 오래된 세월이 거짓이 아니었음이 표정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었다. 물론 그 노인은 물건을 곧잘 팔았다.
"기억은 먼 과거에서 조금 더 흘러 미래의 어느 날... 약 10년 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도 똑같이 같은 시간대의 지하철을 다시 타게 되었고, 낯익은 그 노인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익숙했던 말쑥하고 정연한 신사의 품격은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어눌한 말솜씨 때문에 그가 던지는 대부분의 말들을 알아듣기조차 힘들었다. 그의 행색은 너무나 남루했다. 10년이라는 간극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엔 늙고, 병들었으며, 옷차림은 노숙자의 행색에 가까웠다.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은 노인의 말투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아니 그것은 판매하는 상품이 아니라 쓰레기가 맞았다. 노인은 일장 연설을 펼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노인의 명성을 아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노인의 곁에서 아쉬운 생각을 하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내가 굳이 왜 그때의 지하철에서, 생각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오래전 노인의 기억을 떠올렸을까? 기억의 연상작용 탓일까. 현재의 나와 그 노인의 연관성은 없다. 그냥 어떤 상상할 수 없는 확률의 장난이 나와 노인을 다시 만나게끔 유도한 것이겠지. 그 우연이란 것도 내 남은 인생에 별것이 아닌 것으로 사라지고 말겠지.
잠시 빈자리를 허락한 지하철과 나를 과거로 운반시킨 우연…… 장사꾼을 보고 기억 속에 남은 이미지를 다시 들춰낸 것일까? 내 기억 속에 잠시 남아있던 흐릿한 잔상 탓일까. 그 노인의 남은 삶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 노인은 무엇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린 상태에서도 삶을 이어가기 위한 처절한 선택을 하며 살아야만 했을까? 알 수 없는 타인의 상처,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기적 호기심, 지금은 잠들었지만 작은 연민이 아직 내 가슴속에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노인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일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던 청춘의 옛 기억일 수도 있다. 기억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순간을 찾으려 공간을 떠돌고 있던 건 아닐까? 온전하지 않은 정신이라도, 마지막 죽음 전까지 가장 하고 싶었던 자신의 직업……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야만 하는 본능의 작용은 아니었을까?
가끔은 그저 스쳐 지나갈 평범한 일상이……
떠나간 과거의 잔상이……
기억의 여정 속에서 잊히지 않고 꾸준히 순환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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