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간이역에서...
봄이 성큼 내 마음에 큼지막한 자리 하나를 차지할 즈음이었다.
봄은 고요했던 마음을 일렁이게 했고 굳어있던 표정을 슬며시 녹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흔들리는 봄바람이 가슴에 더해져
정말이지 어디로든 떠날 수밖에 없는 선택을 나에게 강요하곤 했다.
지난한(至難) 시간을 걷어치우고
삶을 막 시작한 봄꽃이 목청을 돋우기 시작한 어떤 날
나는 기차역에 있었고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혹은 누군가를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북적거리는 봄기운을 잠시 진정시키려고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려는데, 옆에 있던 낯선 이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뜬금없이 '바둑을 좋아하느냐'라고 물었던 것이다.
'둘 줄 아느냐' 묻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느냐'라는 질문……
참으로 어색하고 난데없는 그런 질문이었다.
심드렁했지만 시간을 때우기에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둑이라는 단어가 귀에 꽂히자, 곧바로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는 평생 동안 바둑을 좋아하셨다.
너무 격렬하게 좋아하셨다고 할까?
과한 나머지 아버지에게는 바둑과 함께하는 인생이 더 소중해 보였다.
문제는 바둑이 던지는 '흑과 백'의 진리는 깨우쳐도
다른 것을 돌볼 생각이 별로 없었다는 가슴 아픈 사실이었다.
아버지를 구체적으로 떠올리려 했지만 얼굴이 그려지지 않았다.
오직, 바둑을 지독하게 경멸하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만 그려졌다.
그렇게 혐오하던 바둑을 배우게 된 계기가 있었다.
군 시절, 아버지가 보내주신 '정석 사전'이 그 시작이었다.
버릴까 말까 하다가 머리맡에 덩그러니 홀로 두었었는데
시간이 정체되던 어느 날 호기심이 일어났다.
"천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다.
이 책 어딘가를 뒤져보면 감춰두었던 아버지의 세계가 있지 않을까?"
두꺼운 책과 사투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바둑을 저절로 익히게 되었다.
19줄에 담겨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확률의 의미를 차츰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왜 비극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마약 같은 바둑의 원리을 체험하면서 문제점을 진단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고르고 또 나에게 소포로 보내셨을까?
낡은 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아버지는 어떤 시절을 떠올렸을까?
나의 돌과 아버지의 돌이 사납게 부딪혔다.
하얗고 검은 섬광이 번개처럼 번쩍거렸다.
불질러버리고 싶을 만큼 미웠던 사각형 위에서
내 손가락은 증오의 옷을 갈아입었다.
상대가 누구건 반드시 이겨야 했다.
낯선 상대에게 일부러 진흙탕 같은 싸움을 걸었다.
지는 게 너무 싫었다. 누구든 아버지에게 지는 것 같아서……
너무 늦었지만, 아버지에게 이유를 묻고 싶었다.
왜 가족조차 멀리했어야 했느냐고
아들에게 왜 인생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아버지는 말없이 돌을 이어나갔다.
마치 내가 가야 할 정의로운 길을 인도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당장 이기고 넘어서야 하는 길이 아닌,
때로는 비겁하게 비켜가더라도 지면서 살아남아야 함을……
좀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기다림을 가르쳐주고 계신 듯했다.
이제는 어렴풋이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반대로 움직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오랜 침묵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에게 굳이 이유를 묻지 않는다.
아버지가 걸어갔던 길을 찬찬히 복기함으로써,
원망과 증오의 감정을 사석으로 남겨 둔다.
입을 다문 나는 침착하게 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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