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자유
기억 속에서 차츰 흐려져가는 빛바랜 사진처럼
이제는 잔상만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그 시절 우리 집은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었으며
한 마디로 가세가 기울어진 나머지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하지만, 나는 나를 억압하는 현실세계에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기에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어두운 마음을 밝히고 빈 마음을 채우려 했고
그것들 덕분에 때로 불가능한 장애물까지 뛰어넘곤 했다.
상상력을 주로 키웠던 곳은 책상 밑, 비좁은 공간이었다.
나는 그 비밀스럽고도 아늑한 공간으로 기어들어가 입구를 의자로 숨기고
작은 랜턴 하나에 의지한 채 동화책을 읽곤 했는데,
그중에서 각별하게 애착을 보이던 책은 <소공녀>였다.
주인공 소녀가 전하는 이야기에 빠져들 때마다
나는 현실과 상상을 오고 가며 소녀와 더 긴밀해졌고
현실에 대한 원망보다는 내일에 대한 작은 희망 같은 것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소녀에게 하고 싶은 얘기들을 혼자 주저리주저리 털어놓곤 했는데,
소녀는 내 얘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려주곤 했다.
그러다, 골목 끝에서부터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려오면
상상 속에서 꿈을 꾸고 있던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느지막한 시간에 들리던 울림의 주인공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것이 미안했는지
늘 큼지막한 종이봉투를 들고 왔다.
아버지 손에 들려있는 것들은
치킨, 군고구마, 군밤, 아이스크림, 바나나, 과자와 같은 군것질거리였다.
내가 미안했던 것은
아버지의 얼굴보다 종이봉투 속 내용물에 더 반가운 마음이 컸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손이 텅 비어있던 날은
우리 집이 더 가난해진 것은 아닌가
조만간 다시 이사를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거리에 휩싸여
괴로운 마음을 벗어날 또 다른 상상거리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런 일이 벌어진 날은 동네 녀석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없어서,
다음날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릴 정도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무언가 안기는 걸 무척 좋아하셨던 것 같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간접적으로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손쉬우면서도 투박한 방법이었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종종 받아먹고 자랐으나,
그리던 아버지의 모습은 <소공녀>와 같은 세상에 따로 있다며
현실의 나약한 아버지를 부정했다.
자라나면서 아버지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더 멀어져만 갔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나는 결국, 아버지가 없는 빈 그늘에서
아버지만큼이나 세월을 들이키고 내뱉고 난 후에야
그토록 지우고 싶어 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나에게도 있다는 걸 발견한 후에야
그냥 흘려보내고 말았던 시간들의 소중함과
남자로서 힘들게 떠받쳤던 삶의 정체를 겨우 깨닫는다.
늦은 밤이 시작될 때마다 다시 선명한 기억으로 되살아나는
밤 깊은 시간, 아버지의 환영
들릴 듯 말 듯 아득한 아버지의 구두굽 소리
투박스럽게 수염을 비비던 아버지의 촉감
그리고 내용물이 아닌 누런 종이봉투의 공간감이 그립다.
이제는 흘러넘쳐서 내다 버려야 하는 고민을 하며 살고 있는 나
생각을 비우겠다고 늦은 사색에 휩싸인 나
하지만 더 갈증이 나고 배가 고픈 건 무엇 때문일까...
받을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심야의 시간...
가진 것도 없었고 늘 부족했으나, 희망을 안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의 결핍을
끝도 없이 상상할 수 있던 무한한 자유를
다시 맛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