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다 : 현실과 타협

나이 때문에……


<달과 6펜스를> 집중해서 읽고 있던 순간이었다. 눈에 안개가 끼어서 갑자기 잘 보이지 않았다. 침침한 느낌이 들어 눈 가장자리를 비벼댔다. 옆으로 번져있던 글자들이 잠깐 선명해지는 것 같아 보였으나 다시 글자들이 두 겹, 세 겹으로 겹쳐 보였다.

"그새 내 눈이 나빠졌나?"

안경을 다시 맞춰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을 했다. 그렇다고 새 눈을 사서 바꿀 수는 없는 거니깐…… 쓸데없이 눈을 비비기도 멀쩡한 렌즈를 열심히 닦아 보기도 했다. 그러다 게슴츠레 눈을 떠 봤다. 썩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임시처방으로는 나쁘지는 않았다. 앞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아내가 한마디 했다.

"왜 갑자기 인상을 써?"

아…… 눈을 찡그리니 미간도 같이 찌그러졌던 모양이었다. 표정이 무너졌다고 해야 할까? 내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아내에게 비친 것이었다. 나는 표정을 다시 고치고……

"어…… 잘 안 보여서 말이야. 이렇게 미간을 찌푸리면 잘 보이네……"
"눈이 잘 안 보이면 안과를 가야지. 글 쓰는 사람이 눈을 소중하게 생각해야지. 주말에 같이 안과 가보자"

언제였던가 신문기사 하나를 읽었던 기억이 났다. 야생의 침팬지가 나이를 먹게 되면 동료의 털을 골라주기 위해 점점 몸을 뒤로 이동한다는 사실이었다. 가까운 것이 잘 안 보이는 증상, 그것이 바로 노안인데 영장류인 침팬지도 인간과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침팬지가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랄까. 나에게는 모자란 눈을 보조할 수 있는 안경이라는 도구가 있으니 말이다.

안경이 두꺼워서였을까. 아니면 무거워서였을까. 감각도 무디어지고 시간도 무디어지는 순간, 콧등에 걸쳐있던 안경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리고 끝마디에서 간신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다. 어둑하고 흐릿한 세상에서 막 탈출한 기분이 이런 걸까. 내 눈에서 조금 멀어진 안경이 날 구제했다. 습기에 축축했던 글자들이 선명해진 것이다. 하지만, 뒤죽박죽 범벅으로 물들었던 글자가 또렷해졌다는 사실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내가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니깐... 나도 노안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정확히 증거하는 거니깐... 그 사실을 다시 깨닫는 순간 나는 서글퍼졌다.

나의 욕심이 눈에게 피로를 가중시켰다는 걸 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멈출 수는 없다. 그리고 현실과 타협하며 적당히 몸을 돌보면서 갈 수도 없다. 나는 이 사실을 여전히 부인해야 한다.

"오빠도 나이를 먹었나 봐. 콧잔등에서 반쯤 밀려버린 안경이 그걸 말하네. 우리도 나이 앞에서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좀 쉬어가면서 해. 쓰는 것이든 읽는 것이든 말이야……"

그래도 난 멈출 수가 없다. 폭주기관차처럼 달아오른 나는 이제 또 다른 동력이 필요하다. 이미 멀리 달려왔고 앞으로도 더 멀리 달려가야 하겠지. 종착지가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지금 내가 안경을 고쳐 쓰고 눈을 비비는 습관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안경이 콧잔등에서 밀려나버려도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겠다.


http://www.yes24.com/24/GOODS/41833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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