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다 : 신중함

충분히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요!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개발 중인 제품의 시연을 위해 고객을 만나러 갔다. 최고의 두뇌로 구성되어 있는 집단이라서 그럴까? 내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설명하는 손은 부들부들 떨렸고 머릿속은 캄캄한 암흑천지로 변하기도 했다. 수없이 반복했던 사전 시험과 테스트의 기억이 멀어졌다. 연습할 때는 잘 돌아가던 프로그램이지만, 고객과 마주한 자리에서는 꼭 에러를 토해낸다고 하는 '데모의 법칙'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준비한 것이 약간은 모자랐던 걸까. 고객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걸까. 예측대로 프로그램이 작동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서로 달랐다. 시연을 진행하며 설명하고 있던 나는 고객의 싸늘한 눈초리 앞에서 변명만 늘어놓기 시작했다. 프로젝트의 성패가 좌우되는 최일선에 서있던 나는, 그 긴박한 순간 죄인이 되었다.

고객은 자신의 요구 사항을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스스로도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모호함 속에서도, 고객 마음속 깊이 있는 것까지 이해하고 끌어낼 수 있는 것이 개발자의 능력이라고 한다. 대체 분명한 말을 해줘야 알지, 그림이라도 구체적으로 그려줘야 알아먹든가 말든가 할 텐데, '좋게 만들어 주세요',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주세요'라고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면 내가 그 속뜻을 어찌 알겠는가.

"저희한테 보여주시려면 최소한 ***급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한두 푼도 아니고 몇 억의 예산이 들어가는데 확신을 보여주셔야죠"
"네…… 기술적 검토를 해본 결과 지금 보여드리는 수준이 최선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이 정도 퀄리티 가지고는 예산 확보하기 어려워요. 이런 기술 구현은 누구나 하는 거 아닌가요? 기술적 한계에 대하여 저한테 설명하지 마시고 가능한 방법을 찾아서 다시 제안해주세요. 오늘 실험한 데이터를 수집하셔서 오차율을 얼마나 향상시킬 수 있는지 실험 계속하시고 그 통계 자료를 정리해서 보고해주시고요."

1%의 가능성이 살아있을지라도 그럴싸한 말로 꾸며대고 싶지 않았다. 너무 솔직해서는 안 되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영업은 고객과 나의 눈치를 동시에 살폈다. 영업은 말들을 치장하고 싶어 했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그의 입을 닫으려 했다.

개발자의 양심이 있다. 불가능한 것을 된다고 무조건 장담할 수는 없다. 개발자는 예스맨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 자리에서 무조건 '오케이. 할 수 있어!'라고 대답하는 것보다는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분석하는 것이 먼저다. 영업에게 덮어놓고 가능하다는 거짓말을 하게 되면, 대답은 다시 개발자에게 '책임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말 한마디로 팀원의 일상이 다시 전쟁으로 돌변하게 된다. 무리한 일정을 떠안고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숙제가 기다리게 된다.

영업은 회사의 이익을 위하여 최전방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이니, 고객을 현혹시키기 위하여 조금 부족한 것들을 풍성한 것처럼 포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개발자에게 돌아간다. 불가능한 것을 그 자리에서 해보겠다고 다짐하는 것 자체가 무책임이다. 기술적 완성도는 열정으로 덮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불확실한 일들에 대하여 쉽게 호언장담해서는 안 된다.

열정이 차고 넘치더라도 시간과 실력이 없다면 결과는 불확실한 것이다. 무책임한 발언은 파국의 결과를…… 한계가 명확한 현실을 거짓으로 포장한, 즉 '가짜 열정'으로 둔갑시킨다. 가짜 열정은 개발자를 숨 막히는 고통으로 내몬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명료한 파악이 먼저 우선이다. 무모함은 절대 용기가 아니다. 개발자인 당신이 지금 이 순간 머뭇거린다면 그것은 실력이 없어서가 아닌 신중하기 때문이다. 확신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하여 가끔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

"조금 더 신중히 분석할 시간을 주세요. 충분히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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