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열등감에 대하여......
닫힌 창문을 두고
바깥에서 바라보면
기대고 싶은 날은
딱딱한 이부자리에 누워만 있어요
빈 방에서는 타다 남은 촛불이
공기 중으로 날아오르다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모를
임자 없는 화살에 맞아 쓰러져 있어요
손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내 몸집은 줄어들고 있어요
키 큰 사람이 앞장서 가던
용기가 오늘도 부러워요
바깥쪽에서 기웃거리다 나는
유난히 작은 구멍을 찾고 있어요
내가 숨을 곳은 어디에 있나요
말을 좀 해봐요
나에게도 빛은 있나요
기운을 좀 내보면
그늘진 햇살이 처음 놀러와
기지개라도 펴주지 않을까요
내게 찾아온 것은 오한이었어요
차가운 물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감기에 든 것처럼 몸이 떨려요
헛것이 보이는 건지
허기가 진 건지
나는 피어나는 새싹을 음식인 양 삼키려고 하네요
부러진 화살에도 꽃을 피우고 싶나 봐요
내 배고픔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나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늘 아프다던 핑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제 손님에게서 방을 내어놓으라 해야겠어요
내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놔야겠어요
"통기타와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10대부터 중년층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받아오던 가수 김광석氏가 돌연 숨졌습니다."
"뭐라고?"
공항 가는 버스 안이었어요. 그의 죽음은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로 다가왔습니다. 구석자리에서 졸고 있었는데, 공기가 푹 꺼져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말도 안 돼……"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야 내 여정이 필리핀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질문을 계속 던지지 않으면 목적지를 잃을 것 같았습니다. 난데없이 터진 불길함에 나는 방향을 잃고 있었습니다. 나와 관계없는 타인의 죽음, 하지만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나는 쓰러져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의 노래는 열등감에 휩싸인 나에게 빛이었고 위로였습니다. 나의 귓가에는 전날 학전 소극장에서 울려 퍼졌던 목소리가 생생했습니다. 그의 노래는 깊이 내재되어있던 '스스로 볼품없는 존재라며 자책하던 마음'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필리핀 선교 봉사를 놓고 반대하던 얼굴들이 나타나서 뇌세포를 쪼아먹기 시작했습니다. 가난이라는 탈을 쓴 망령, 자신감을 잃은 허약한 유령, 영적으로 준비가 안되었다고 포기하라는 검은 악마, 자격지심으로 무너진 영혼들이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 영원히 갇혀버리는 상상을 했습니다.
나는 음울함을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필리핀을 찾았습니다. 필리핀에서 나는 리더였습니다. 마닐라 공항에 도착하여 이곳저곳을 뛰어다니자 몇 달 동안 한국에서 받던 훈련의 기억이 찾아왔습니다. 준비한 것을 차근차근 진행했습니다. 나쁜 기억은 어느새 잊혔습니다. 필리핀은 내 어두운 내면을 감쌀 만큼 푸른빛으로 가득 찼습니다. 허물어진 마음을 채우는 순수함이 있는 곳이 필리핀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혼들이 충돌하는 치열한 내적 싸움 속에서 나는 아픔을 잊을 만큼 바빴습니다.
필리핀에서 약 30일을 보냈습니다. 마지막 날 휴식차 바다를 찾았습니다. 고생한 시간들에 대한 작은 배려였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 조원들은 작은방에 모여들었습니다. 바빴기 때문에 서로를 돌아볼 시간이 우리에겐 없었습니다. 희미한 촛불 하나를 켜놓고 좁은 방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앉았습니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 사람, 벽을 기대고 책상다리로 앉은 사람, 방 입구에 슬쩍 걸쳐 서 있던 사람,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있던 사람, 우리는 그 순간 필리핀 사람이 아닌 각자의 정체성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각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기로 했습니다.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우린 각자에게 어떤 모습이었는지 가슴에 새겨진 글자들을 확인해보기로 했습니다. 누군가 가방에서 연습장 하나를 주섬주섬 꺼냈습니다. 그리고 한 장씩 북 찢어서 나눠주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써주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것에 어색했지만, 앞으로 우리가 볼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라고 생각했기에 고운 말을 써주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말들이 포근했기에 나는 그것을 가로채 연습장에 옮겨 적을 따름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각자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받아들었습니다. 나는 방을 나가 별빛이 쏟아지는 해변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여러 번 접힌 종이를 조심스럽게 폈습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달빛 때문에 읽는데 지장은 없었습니다. 나는 찬찬히 글자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선배는 표정이 너무 굳어있어요."
"처음에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해내시는 거 보고 좀 놀랐어요."
"인상이 좋으신데 좀 더 웃으면 좋겠어요. 가끔 무서웠어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했어요"
"좀 긴장했던 것 같은데, 이제 웃어도 되지 않을까?"
몇 글자에 유달리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습니다. 갑자기 출국하기 전 라디오에서 들었던 김광석의 죽음이 기억났습니다. 무슨 일이었을까요. 억누르고 있었던 열등감도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난 굳어있다는 말'이 가장 듣기 싫었습니다. 내 스스로 그 얼굴을 받아들이기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의 텅 비어있는 방, 구석 어딘가의 내가 보였습니다. 고독의 세계에서 방황하고 있던 소년의 눈물이 비쳤습니다. 소년인 나, 필리핀에서의 나, 훌쩍 몸은 성장했지만 굳은 표정은 감출 수 없었습니다.
나는 손을 소년에게 내밀었습니다. 낡은 책상 밑에 웅크리고 있는 소년을 꺼내주고 싶었습니다. 시공간을 휘어서라도 신음하고 있었던 소년을 건져내고 싶었습니다. 나와 소년의 손이 바람처럼 흔들거렸습니다. 붙잡고 싶었지만 시공간이 복원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소년을 버려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 말이나 쉽게 내뱉는 사람들이 미웠습니다. 사실 사람들의 말은 별 뜻이 없었을 겁니다. 당시에는 내가 하찮게 취급당했다는 것이 나의 부족함 때문이라 생각하니 자신이 더 역겨워 보였습니다. 내가 이것밖에 못 되는가,라는 열등감에 휩싸였습니다.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니 애초에 그들은 나에게 희망조차 없었던 말인가요. 갑자기 시간을 뒤로 돌려버리고 싶었던 나는 시꺼먼 바다에 뛰어들어 끔찍한 악몽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열등감이란 녀석은 나를 끝없이 구석으로 추락시켰습니다. 의지를 불태울 때마다 녀석은 목 뒷덜미에 싸늘한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너는 절대 헤어 나올 수 없을 거야. 계속 그 음침한 구석에 처박혀서 신음이나 하고 있어"라고 음흉한 이빨을 들이댔습니다. 그 녀석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늘 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 어떤 처방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음을 돌려보고 싶었지만 나는 암덩어리보다 더 고약한 녀석의 농간에 휘말렸습니다.
필리핀에서의 죽을 것 같은 경험도 이제 이십 년을 넘겼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견디기만 했던 그 시절의 열등감을 봅니다. 나는 과거의 열등감이 낳은 오전 또는 오후에 있습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떠올리기 고통스러웠던 김광석의 죽음을, 그에게 의지했던 나날들을, 그리고 그 때문에 추락했던 나의 열등감을 다시 꺼내봅니다. 노트에 적습니다, 나를 스쳤던 순간들을 그리고 기억들을……
나는 기록하면서 어린 시절을, 내면이 추락했던 필리핀의 기억을, 나약한 나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기억을 되감습니다. 적는 것이 상처받은 마음을 고치는 방법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열등감이 글을 낳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숨겨둔 열등감을 하나하나 꺼내어 맞은편 자리에 앉힙니다. 그리고 그와 대화를 나눕니다.
"자 이제 우리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지? 다시 시작해볼까? 너는 이제 좀 작아져야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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