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의 <니체의 인생 강의>에서
"나는 너희에게 위버맨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들 자신을 뛰어넘어, 그들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자신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 하는가"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를 앞에 두고 대중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신와 함께 소멸을 택할 것인지, 자신의 힘으로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것인지. 신의 부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과제가 따른다. 영원히 반복될지도 모를 삶을 무감각적으로 내버려둘 것인가, 단단한 껍질을 깨고 세상으로 뛰쳐나올 것인가. 삶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위버맨쉬(초인)는 uber + mensch 두 가지 단어로 조합된다. 위버는 '뛰어넘는다'는 뜻이고 맨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두 가지를 조합하면 '뛰어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니체가 언급한 초인은 고인물과 같이 정체된 '최후의 인간'과 정반대의 뜻이다. 최후의 인간은 개성이 없는, 집단에 속해서 그들의 이해관계에 얽혀있거나 지시를 따르기만 하는 인간상을 뜻한다. 반면, 초인은 자신을 극복하려 한다.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맞는 질서와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여기에는 의심보다 믿음이 먼저다. 세상을 허무주의나 비관주의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삶을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내가 처한 현실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먼저다. 나는 세상에 속해있는 작은 부분 집합이라 할 수 있다. 커다란 조직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추진체가 된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 하여도 나의 능력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바꿀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면 내면뿐이다. 혼탁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나는 늘 안정을 추구한다. 전쟁이 없는 나라를 원하고 직장에서는 실적을 크게 거두지 못해도 해가 지나면 연봉이 오르길 바라고 가정에서는 사랑하는 가족과 건강하고 평안한 나날을 보내길 원한다. 그것이 행복을 느끼는 지름길이라고 여긴다. 또한 이 정도면 충분히 행복하니 더 이상 도전하지 않는 삶, 이만큼 발전했으니 더 이상 진보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만족하는 삶,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부류에겐 딱 그 수준의 행복이 전부라 생각한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자위하면서.
나는 길을 걸을 때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 타인의 손을 잡으면 안정감을 느낀다. 중요한 결정이 필요할 때마다 자꾸만 그것을 유보하고 타인에게 조언을 구하며 주춤한다. 나만의 가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도 부족하고.
위버맨쉬는 모든 만족을 거부하는 인간 유형이다. 긍정, 부정, 낙관, 비관, 허무, 무감각, 만족, 비극적 상황을 경계한다. 자신의 몸에 깃든 낡은 틀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인간이야 말로 위버멘시의 전형인 것이다. 새로운 가치란 무엇일까? 그것은 각자 다를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정답이라고 믿었던, 안주하며 살아왔던 현실이 새로운 가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그것을 위해서는 내면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무엇이든 극복하라는 니체의 주문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현재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인 것이다. 나를 제대로 알아야 극복이든 뛰어넘는 것이든 할 것이 아닌가.
모두가 옳다고 말하는 진리조차 거부할 수 있을까. 물질적인 것이 전하는 풍요로움과 혜택을 과연 버릴 수 있을까? 이 모든 상태에 머무르려 하는 나는 미래에 대한 동경을 할 수 있을까. 조르바가 얘기한 것처럼, 약탈한 금화를 공중으로 던져버릴 수 있을까. 우리가 스스로 고상한 존재라고 믿지만, 조르바의 말처럼 점점 강한 사슬에 묶인 존재가 되어가는 건 아닐까. 스스로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묶여있는 줄은 내 목을 단단히 옥죄어 오고 있는 건 아닐까. 과연 그것을 잘라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