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태의 <가짜 감정>에서
"화가 나고 분노한 감정은 결국 내 것이다. 상대방의 자극에 의해서 화가 난 것이긴 하지만 상대는 자극을 했을 뿐 화가 난 것은 나 때문이다. 내 안의 분노, 열등감, 외로움 등이 건드려지면서 화가 난다. 똑같은 말을 틀어도 내가 여유로울 때는 화가 덜 난다. 화를 내는 주체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화가 날 때 자극을 준 사람을 비난하거나 야단치게 된다. 그런데 상대방은 내가 화를 내는지 분노하는지 알지 못한다. 안다고 해도 자신의 일이 아니라 늘 신경 쓰며 살지 않는다. 나만 그 사람 때문에 감정에 매여 내 삶을 못 산다 결국 분노와 화는 상대방이 아닌 나를 괴롭히는 감정이다."
작가의 말대로 내가 분노하는 이유 그리고 화의 주체는 상대방이 아닌 '나' 자신에게 있다. 문제는 상대방이 나의 약점을 건드릴 때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그걸 알면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데 있다. 상대방은 내가 화를 내는 이유를 대개 모른다. 내 의식 하부의 치부와 같은 곳을 건드렸는지, 아픈 곳을 찔렀는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상대방은 내 열등감을 환기시켰고, 마음이 평탄하지 않은 상태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나는 상대방의 말을 나에 대한 공격성 표출이라고 여긴다.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라면 위와 같은 상황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되돌려줄 터이니 상처가 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문제는 나를 포함하여 소심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다. 내향적이거나 소심한 사람들은 마음을 여간해서 외부에 노출하지 않는다. 마음이 경직되어있는 경우가 많아서 외부에 사소한 자극에도 스펀지처럼 탄력적으로 반응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막은 탄탄해 보이지만 사실 두터운 구조는 아니다. 단 한 번의 자극만으로도 보호막이 무너질 수 있다. 걷잡을 수 없이...
작가의 말대로 분노하는 감정의 소유도 나다. 우리는 부정적 감정을 전해준 상대방을 바라보고 원망의 눈초리를 보낸다. 온갖 비난의 화살을 쏘아 보낸다. 화살은 힘없이 날아가다 바닥에 꽂힌다. 상대방은 그 어떠한 피해도 받지 않고 편안하게 잘 살아간다.
나 역시 소심한 사람이다. 상대방이 내 안의 화를 자극하면 금세 작은 불씨가 마음 구석구석으로 번져 모든 것을 활활 태웠다. 바깥으로 표출하지 못한 감정은 안에서 울화로 치밀었다. 그것은 내적 불만에서 사회에 대한 불신과 감정의 왜곡으로 이어져 새로운 부정적 감정을 만들었다. 화의 원인인 상대방과 적절한 대화와 타협을 하지 못하고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 불씨만 더 크게 키웠다. 울화가 치밀고 화가 불처럼 타오르면 가슴 한가운데가 콱 막힌 듯한 불편함이 찾아온다. 분노의 감정이 건강에 얼마나 안 좋은지 알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그냥 속수무책으로 감정에 지배를 당하는 순간이다.
그런 감정을 제대로 본다는 거, 아무리 생각해도 참 어려운 일이다. 마음을 차분하게 먼저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세상 살아가기 너무 바쁘지 않은가. 그런 것들은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린다. 생존의 문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탓에 내 감정을 돌보는 것은 밀린다. 그런 것이 삶이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여기며 산다.
도대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내가 지금 화를 내고 있다는 상황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는 화의 원인을 차분하게 생각하고 나의 잘못은 없으니 그것에 영향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에게 위로를 전한다. 상대방의 말이 나의 어떤 약점을 건드렸는지, 내가 왜 그런 감정에 휩싸였는지 분석해보는 것이다. 물론 그럴 때, 글을 쓰는 게 도움이 된다. 내 감정을 종이에 나열해본다. 왜 분노에 가득 찼는지, 상대방에게 원한의 감정을 갖게 되었는지, 객관적으로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지, 그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그런 방법으로 자신에게 집중하다 보면 역한 감정도 사라질지 모른다. 물론 쉽지 않다. 그럼에도 김용태 작가의 말처럼 감정을 돌볼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할듯하다. 우리는 모두 완성된 인간이 아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