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진정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해 타인과 자신에게 가짜 자아를 내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열등감과 무력감의 뿌리이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에리히 프롬, 라이너 풍크, 장혜경 저
'에리히 프롬'이 설명한 열등감의 원인은 결국 자신의 의사를 외부에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는 외부에서 받았던 분노, 스트레스, 슬픔의 감정을 억압한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자신에게 무익하다는 그럴싸한 문장을 전한 교육 시스템에 설득을 당하고 살았다. 그러한 움직임은 자신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과 미래로 향하려 하는 잠재 에너지를 막는다. 억압이란 자신의 의지가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을 억지로 억누른다는 뜻이다. 건강하게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려면 적당한 억압, 즉 지켜야 할 규칙이 필요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개인의 권리가 비이성적으로 차단되거나 타인에게 종속된다면 그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삶을 강요당한 사람이 자발적, 주체적인 의지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을까?
자발적이라는 말은 타인이 강요하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순수 자신의 힘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타인의 강요와 세상이 정한 규칙에 순종하는가. 누군가 정의해놓은 정답이 진리라 믿고 그것을 의심하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품어본 적이 있는가.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 약과 파란 약이 당신 앞에 있다. 당신은 가상 현실의 세계에서 대리만족이나 간접적인 쾌락을 누리는 게으른 삶을 택하겠는가. 실제 세상에서 고난과 위험에 부딪혀가며 상처가 나는 것을 무릅쓰고서라도 성장하고 도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겠는가.
직장인의 경우는 더 무기력한 삶을 지속한다. 나 역시 20년이 넘도록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높은 연봉을 받으며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그렇게 보인다. 맹점은 그것이 자발적이지 못하다는 데 있다. 나의 모든 활동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행동하는가, 우리는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서 젊음을 직장에 바치고 있는가, 오직 직장만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최전선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답은 언제나 명료하지 않다.
문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삶을 무기력하게 방치하는 데 있다. 자신을 속이고 나아가서 내면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다. 물질이 주는 편안하고 느긋한 공간, 사물을 구매할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현재에 안주한다. 이것이야말로 '가짜 자아'이다. 한 번뿐인 인생을 가짜 무대로, 가짜 주인공으로 탈바꿈 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 젖어 대안을 스스로 버린다.
"All or Nothing" 전부냐 제로냐. 와 같은 흑백논리가 문제다. 우리가 선택한 영역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방식,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고방식이 위험한 것이다.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지 않을까.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내가 꿈을 버리지 않고 꾸준하게 글을 쓰며 기회를 엿보는 것처럼, 가능성은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는 사람, 가짜 자아보다는 내면이 원하는 진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열려 있지 않을까. 물론 나도 그것을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다만 어떤 과정에 놓여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