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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26. 2018

당신을 버릴 수 없어요.

지나간 시간이 제법 무겁네요

"낡아 보이는데 이거 버려야 하지 않을까?"


"아…… 이거 결혼할 때, 엄마가 준 스테인리스 주전자야. 썩 좋은 건 아닌데, 엄마가 젊은 시절에 자주 쓰던 물건이야. 내가 스테인리스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나중에 돌아가시더라도 엄마를 오래 기억하고 싶은 이유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있어."


"그렇구나. 이거 정말 소중한 물건이네.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두자"



 아내가 결혼할 때 장모님이 물려준 오래된 스테인리스 주전자다. 장모님이 사용한 세월과 아내가 간직한 세월을 합치면 40년이 넘은 시간의 흔적이 묻어있다. 선이 참 고운 것이 이거 골동품 태깔이 난다. 돈이 될지도 모르니 일단 아껴두는 걸로. (웃음) 우리 부부는 간소한 삶을 추구하며 필요 없는 물건을 꾸준하게 버리고 있지만, 어떤 물건은 그런 선택에서 예외다. 장모님이 아내에게 남겨준, 아니 어쩌면 강제로 침탈했을지도 모르는 스테인리스 주전자도 그랬다. 그 물건은 한동안 사용하지 않은 채 싱크대 한 쪽에 각별히 보관되어 있다.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주전자 하나에 각별한 애정을 쏟는 아내의 사정이 무엇일지 사뭇 궁금했다.


 글쎄, 스테인리스 주전자가 우리 집안의 대를 이을만한 국보급 보물이 될지는 의문이지만, 흔한 금으로 만든 쌍 가락지나 예물로 선물 받은 다이아반지보다, 부모님의 손때가 묻은 낡은 주전자를 더 각별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잘 사용하지 않는 값비싼 장신구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주 사용했던 실용적인 물건이기에 더 애착이 가는 걸까. 장모님과 아내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어떤 정서라도 스며있던 걸까.



 어쩌면 장모님은 딸에게 더 값비싼 물건을 물려주고 싶은 바람이 있었겠지. 작고 낡은 스테인리스 주전자는 고물 취급을 당했으면 하고 바랄 지도. 하지만 재물이나 멋진 가업을 후대에게 물려주는 일만이 가치가 있을까? 그런 걸 받으면 과연 만족할까? 나는 물론 받아본 적이 없으므로 그 감정에 대해선 코멘트하지 않기로.


 부모라면 자신의 몸을 깎아서라도 자식에게 더 좋은 것을 남겨주고 싶은 마음이 크겠지. 자신의 곁을 떠난 자식이 풍요로운 삶을 살며 언제나 행복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한 바람으로 부모는 때로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 우리는 부모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더 많은 것들을 물려주길 기대하고. 


 장모님의 주전자를 열심히 갈고닦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어떤 유산을 물려받았는데, 다시 부모로서 언젠가 자식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여기서 언급한 유산이란 유전자 특성, 성격, 독립심, 재능, 긍정적인 가치관 등을 말하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좋건 나쁘건 간에 자식은 선택할 권리가 없다. 단순히 이어받아야 할 뿐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투정 부리지 마라. 자식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불완전한 것을 물려받아 완벽하게 만드는 일이다. 조금 부족한 것을 물려받았다고 하여 불평불만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상태가 되도록 예쁘게 다듬는 것이 아직 미완성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자식 입장에서는 물려받는 것이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물려주는 것으로 상황이 바뀐다. 물려주는 것은 다음 세대가 주인공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부모가 가진 재능을 그대로 전수함을 뜻한다. 부모는 험난한 삶을 홀로 살아가야 할 자식이,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자신이 어쩌면 불완전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인생을 살아왔기에 자식에겐 그러한 삶을 물려주기 싫은 것이다. 갈고닦고 정성스럽게 포장한 자산을 자식에게 남겨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



 Joyce Fogel 박사에 따르면 인류는 조만간 100세를 뛰어넘어 150세까지 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나 역시 오래 살고 싶지만 나와 같은 베이비 붐 세대가 누릴 혜택은 아니다. 노인들이 득시글대는 세상, 파고다 공원에서 장기 훈수나 두는 그런 그림 상상하기 싫다. 다음 세대가 우리보다 양질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것이 우리가 부모로서 자식에게 남겨준 가장 큰 유산은 아닐까.


 그리스 속담에 "자신이 그늘 아래 앉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노인들이 나무를 심을 때 한 사회는 위대하게 성장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나무를 심어 그 나무가 성장하고, 풍성한 가지와 잎이 생겨 넓은 그늘을 만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자신의 세대에서 혜택을 보장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자손 또는 자손의 자손이 언젠가 그늘에서 즐거움과 휴식을 누릴 수 있다면 기꺼이 현재를 희생한다. 


 어디선가 장모님의 음성이 들리는듯하다. "낡은 주전자는 이제 버리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부모가 물려준 자산은 우리를 어떤 순간으로 이끈다. 장모님의 행복한 시절로, 다시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시간으로. 언젠가 부모님이 우리 곁을 떠나면 이런 추억 여행을 더 자주 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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