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에 당신을 초대하며...... 공대생의 심야서재에서
상상만 하면 미래는 원하는 대로 열릴까?
상상에 하얀 구름, 파란 하늘, 세찬 바람, 소나기 정도는 더해져야 높이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그럼에도 아침에 눈을 뜨면 바라던 꿈을 잃어버린 것 같은 실망에 젖는다. 점점 멀어지는, 가닿을 수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며.
그리하여 절실함이라는 선물을 포장한다.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혹시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기다림에 지친 이에게도.
하얀 햇살, 아이들의 눈부신 웃음이 동시에 빛나는 아침은 한숨보다 희망이 잘 어울린다. 잃은 시선을 찾아서 그리고 먼 곳을 보고 싶은 소리를 들고 세상 밖으로 향한다.
글쓰기란 나에게 무엇일까? 아니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존재하지도 않은 파랑새를 찾아 나서는 여행자의 헛된 몸부림은 아닐까. 그래서 그 생각이 돌부리가 되어 발을 걸고 쓰러뜨리는 건 아닐까? 그래, 2018년 9월의 어느 아침에도 쓸데없는 생각은 찾아왔다 바람에 날아간다. 나뭇가지에서 한철을 보낸 갈색 잎이 떨어지다 어디론가 비행을 다시 시작하듯, 나도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서 비행한다. 가끔은 낮지만, 어느 날은 높은 곳에서 바람 돛을 달고 훨훨.
평택까지 2시간 40분, 지하철을 탈까? 버스를 탈까? 책이라도 잠시 펼쳐볼 수 있는, 허리는 좀 아프더라도 지친 생각을 위로할 수 있는 오랜 시간이면 더 좋겠다. 상상을 해본다. 어떤 사람과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나의 속마음이 말과 글을 타고 죽지 않고 살아서 세상 끝까지 날아갔으면, 바람이 멈추지 않고 당신의 마음에 머물렀으면.
지하철 출입구 대각선 끝 자리, 사람이 무심히 지나다니는, 다소 시끄러운 곳에 앉아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를 잠시 잊고, 읽던 페이지를 찾는다. 집중을 하기에는 소음이 방해하지만. 뒤적거리다 평온을 찾기도 하고, 옆자리 아주머니의 수다에 귀를 기울이다 정신을 세상에 가출시키기도 하며. 사는 것이란 늘 그렇다. 목적지가 분명하여도 과정 속에는 순탄함뿐만 아니라 예측하지 못할 변수가 가득하다는 것, 그래서 지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메모했던 종이를 꺼내든다. 오늘 강의 시간에 해야 할 말들이 적혀있다. 머릿속 공간이 텅 빈 느낌이 든다. 공부란 역시 시험이 닥칠 때 효율이 나듯, 글자를 텅 빈 공간에 욱여넣는다. 조급함과 여백이 가방 속에서 순순히 미소를 보낸다. 목적지에 도착과 동시에 동네를 가만히 조망한다. 처음 찾는 평택, 이곳에서 사람은 가득하고, 이야기는 살아서 나부낀다. 소중한 순간, 하나라도 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내 심장의 바람을 이곳에 울려보고 싶다. 생각은 여운이 되고 도시, 아니 시골 어딘가에서 잠시 머무르려나. 생각을 고이 접고 접어서 길가에 뿌려둔다. 바람이 우체통이 되어 언젠가 당신에게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보내줄 거라는 믿음과 함께.
강의가 시작됐다. 몇 분이 찾아오셨다. 황금 같은 주말, 그것도 단란한 저녁 시간에.
상처받은 마음은 왜 생겨나는 걸까.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뭐 그런 것을 이야기했다. <라틴어 수업>에서 읽었던 문장이 생각났다. “Vulnerant omnes, ultima necat.” 한국말로 “모든 사람은 상처만 주다가 종국에는 죽는다”다는 라틴어 문장 말이다. 이 말은 프랑스 바스피레네 지방, 위레뉴 교회 한편에 있는 해 시계에 새겨진 문장이라고 한다.
우리는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는다. 문제는 말 끝에 독이 묻은 화살촉처럼 누군가에게 쓰라린 상처를 남긴다는 거다.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의 말에 독이 함께 담겨있다는 사실조차 모르지만. 우리는 그런 말을 받아 아프다. 왜 내가 화살을 맞고 피를 철철 흘려야 하는지, 고통에 울어야 하는지 납득이 안되는 거다. 말이 상처가 되는 것은 속에 눌러둔 열등감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잊고 싶던, 떠올리기 싫던 치유되지 않은 괴로움이 다시 심장을 쿡쿡 찌른다.
글쓰기가 마음을 어루만지고 토닥이는 이유는 상처를 성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외면하려 했던 과거를 마주 보게 하고 그것을 객관화하도록 이끈다. 치유하려면 마음 바깥으로 들추어내야 한다. 힘들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마음과 분리된 상처는 이제 회복의 기회를 기다린다. 약을 발라주고 감싸 안는다. 상처를 보고 약을 발라주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 습관이 될 때, 상처는 자유를 얻는다. 치유할 에너지가 생기는 것이다.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열몇 분이 모여 일주일마다 글을 한편 쓰고 온라인으로 모임을 연다. 글을 읽는 것은 삶을 엿보는 행위다. 나의 세계를 확장하여 신세계로 영역을 넓히는 거다. 낯선 세계를 경험하고 미지의 세상을 탐구하는 개척자가 된다. 글은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수단이다. 첫 번째 경험을 안고 타인의 삶과 우리는 소통한다. 그리고 이해한다. 글은 섬과 같은 사람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글을 읽고 교감하며 잠시 섬에 머무른다. 여행하듯 한 명의 글벗에게 위로를 주고 또 다른 섬을 찾아 글벗과 대화를 나눈다.
나도 몇 개의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나머지 사람들도 그럴 거다. 매주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 밤이 기다려지는 건, 마음으로 소통하는 시간이 소중해서일 거다. 고통을 본다는 것이 두려웠다. 내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세상이니, 타인의 고통에 어떤 말을 내밀어야 할지 그것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안다. 듣는 것만으로도, 작은 말이 위안이 된다는 것도, 경험으로 안다.
<공대생의 심야서재>를 운영하는 나는 글쓰기 모임의 리더다. 현재 1기가 6주 차를 맞고 있다.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모임은 안정됐다. 5주가 지나면 1기가 끝난다. 매주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쓴다. 라인 메신저를 이용하여 온라인으로 합평을 하는 방식으로 서로 소통한다. 각자는 꿈을 꾼다. 자신이 쓰는 글이 더 많이 읽히길.
2기 때는 진보된 방식을 도입하려고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다. 한 권의 책을 읽고 10주 동안 집중적으로 글을 쓰는 모임이다든가, 자신의 이야기를 10주 동안 꾸준히 나눠본다든가, 어떤 방식으로든 개선을 하려고 한다. 물론 나는 글벗들의 글을 읽고 A4 한 장 이상의 코멘트를 남긴다. 조금이라도 좋은 글을 썼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그들의 글이 더 빛나길 바라며.
<공대생의 심야서재> 글쓰기 모임에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설문에 답하기 바란다.
글쓰기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https://goo.gl/12ANbM
“시 읽기 모임”에도 초청한다. 시 읽기 모임은 시 한 권을 함께 읽고 짧은 느낌을 공유하는 모임이다. 시를 읽지 않는 세상, 시 한 편으로 우리의 삶이 얼마나 바뀔 수 있는지, 그 믿음을 함께 체험해보자는 기획으로 출발했다.
모임 참여는 아래의 채팅 방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