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꿈이었을까.
바람이 들어오는 소리에 그만 잠이 깨고 말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침대 두 개, 작은 소파 하나, 굳게 닫힌 이중창, 반쯤 열린 방문이 전부였다. 밀실에 바람의 출입을 허락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뒷머리가 잠시 욱신거렸다는 건 확실했다. 적어도 남은 기억은 그랬다. 그 기억이란 것도 다시 찾아온 잠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만.
안녕하세요. 저는 ‘공대생의 심야서재’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어요. 공심이라고 불러주시면 될 것 같고요. 낮에는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고 있고요. 피터님과는 ‘좋아요’나 댓글이나 다는 ‘샤이 팬’이었다가 개인적으로 만나 인사를 나누었어요. 글쓰기 모임에 주로 참여했어요. 50일 글쓰기, 매일 글쓰기에 참여했고. 지금은 졸업했어요. 내 삶의 한 컷과 유튜브 모임도 하고 있어요. 최근 한 달 동안은 거의 업로드하지 못했지만요. 모임에 참여하면서 변화된 것은 꾸준함이에요. 저는 나태하고 미루기 좋아하는 사람인데, 피터님 모임을 통해서 의식적으로 꾸준한 습관을 기를 수 있었어요. 책은 얼마 전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었는데 감명 깊어서 그의 산문도 궁금해서 구매했어요.
금요일은 보통 외근을 잡는다. 바깥으로 나가야 할 만큼, 고객과 회의를 해야 할 만큼 정신없으니까. 아니 바빠야 한다. 바쁘게 누군가에 보여야 하니까. 그런데 실제 바쁠까? 그것에 즉답은 피하겠다. 운 좋게 어제는 일이 여백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약속 시간을 두어 시간 앞두고 서점에 안착했다. 책을 읽으면서도 오늘 어떤 분들을 만나게 될까. 아니 닉네임으로 소통했던 분들은 과연 어떤 분위기일까. 이런저런 궁금증이 안정을 방해했다. 시간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넓은 서점 한 귀퉁이에 마침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멍하게 앉아있으니 눈앞에 2019년에 유행할 트렌드, 이런 유행에 민감한 책들이 보였다. 아무거나 뽑아 중간쯤 들여다보다 저자가 청춘의 아픔을 당연시했던 ‘K 교수’라는 걸 알고 바로 덮어버렸다.
피터님과 모임 한 시간을 남겨 두고 만났다. 우리 꽤 자주 만나는 사이다. 평균 한 달에 한 번은 만나는 것 같다. 피터님은 가방 두 가지를 들고 있었는데 무거운 건 피터님이 들고 상대적으로 가벼워 보이는 걸 내가 들었다.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라고 항변한다. '물푸레 나뭇과의 상록 교목(올리*)'이라는 단어를 가진 숍으로 들어갔다. 몇 가지 물건을 사는 피터님을 도촬 했다. 그리고 “내 삶의 한 컷”에 공유 완료.
카페는 아늑했다. 밖에는 난폭한 바람이 배회하는 중이니 나가지 않는 편이 이로웠다. 빈 카페에 앉아 사진이나 찍고 있으면 시간이 잘 지나갈 것 같았다. 노트 8을 들고 삶의 궤적을 남기려 촉수를 더듬고 다녔다. 아래는 스스로 그럴싸하다고 둘러댄 사진 몇 장 들이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봉인된 긴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차라리 집에 가버릴까? 피터님에게 급한 볼일이 생겨서 자리를 떠야 한다고 말할까. 소심남이 아닌가. 이런 거짓의 북소리가 심장을 세차게 두들겼다. 잡화점 멤버의 몇 분의 등장과 함께 영화 <쥬만지>에서 들릴 것 같던 북소리는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무엇보다 미소를 짓게 한 건 먹거리들이었다.
퀴즈 시간. 아쉬웠다. 항상 순발력이 문제였다. 10문제 중에 기껏 대여섯 문제밖에 못 맞추다니, 나의 모자란 잉여력이 문제가 아닌가. 게다가 느려 터진 손가락과 뇌의 궁합은 말할 것도 없었다. 뭐 다른 퀴즈에서 한 가지 상품을 타긴 했다. 그것도 기억력이 아닌, 내 전공과 1% 정도는 관련 있는 검색 능력 때문인 것이 부끄러웠으니까. 의기양양해진 나는 아내에게 받아온 상품을 집에 돌아와 내밀었다. ‘나 버츠비 타 온 남자야’ 외치며, 아내는 조용히 불이나 끄고 잠이나 자라고 말했지만.
쪽지에 적은 내년도 목표. 과연 실현 가능? 안전을 위하여 글자 하나는 모자이크 처리.
자기소개와 더불어 책 교환 의식을 가졌다. 백화점 문화 센터에서 강연한 느낌과는 달랐다. 잠자던 원숭이가 다시 날뛰었다. 몇 마디의 진지한 문장을 던지긴 했는데, 어떤 문장은 뜬금없기도, 맥락을 잃기도, 무인도에 벼랑 끝 감옥 109호에 가두고 싶은 문장이었다. 압권은 토로군님의 선물 증정이었다. 물론 피터님의 선물도 고맙지만, 누군가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 아닌가. 그 선물은 온전히 나에게만 향한 것이 아닌가. 스포트라이트 받는 거 그래 나쁘지 않다. 나에게도 무대 체질은 조금은 있는 걸로.
상투적인 문장으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이 경험수집잡화점의 일원이 된다면 가끔 나처럼 엉뚱한 글 하나 정도는 쓸 내공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 그건 피터님이 도와주실 게다. 가끔 나도 활약을 펼칠 순간이 있을지도. 암 그렇고말고. 의심하지 않는다. 피터님이 어떤 길을 가건, 어떤 선택을 하건 우리가 밟지 못한 지평을 펼쳐줄 거라 기대를 해본다. 그가 준비하는 신묘한 경험들을 기다린다. 아, 생각해보니 내가 피터교의 2순위 정도는 될지 모르겠다. 1순위는 모모님이니까. 영광을 넘긴다.
오후 12시가 넘었다. 오늘은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한다. 신논현 부근의 호텔이라고 하는데, 영하 12도라고 날씨 앱이 법원 속기사처럼 글자를 두들긴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목덜미가 뻐근하고 어제의 의식에서 제정신으로 복귀하지 않는다. 혼잣말로 약속을 던진 기억은 남아 있다. 퇴*, 어쩌고 였었나. 이 모든 것이 꿈만 같다. 이제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