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an 12. 2019

웃으면 복이 오는 과학적 이유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으리라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으리라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되리라

고독/엘라 휠러 윌콕스


당신은 테러리스트에게 감금당한 상황에 처했다. 테러범은 난데없는 요구 조건을 하달했다. ‘웃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 그것이 테러리스트가 당신에게 내린 당면 과제다. ‘웃어, 웃으라고 울면 죽어’, 살고 싶으면 처웃으라니 인질에게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탈출하고 싶어도 방법은 없다. 자, ‘포기하고 죽음을 가만히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라면 ‘구석에 숨어있거나 웃는 시늉이라도 할까?’ 차라리 테러리스트에게 돌진하여 장렬하게 폭사라도 하여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라도 실리게 해야 할까? 그래, 용감한 시민 상이라도 받아보는 거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웃으라니 저 테러범 참 해괴한 놈이다. 어떻게 웃으라는 얘긴가. 허연 이라도 드러내 놓고 밝은 미소라도 지으라는 건가. 입가를 양쪽으로 크게 치켜올리고 박장대소라도 퍼부으라는 얘긴가. 실컷 웃었다가 입에 총알이라도 박히면 어쩌라고. 절망적인 상황을 앞에 두고 웃으라니 차라리 죽는 편인 나은 거 아닌가. 테러범 멱살이라도 흔들고 싶다.



이야기를 과장되게 꾸미긴 했지만, 이런 이야기는 현실에서 꽤 유사하게 벌어지기도 한다. 고등학교 수학 시간이었다. 당시 수학선생님은 자신이 가르치는 것보다 학생들이 문제 푸는 걸 교탁에 앉아 지켜보곤 했다. 아마 수알못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귀찮은 면도 있었겠지만 관음증이 더 작용했으리라 짐작한다. 문제를 풀지 못해 고생하는 수포자들은 체벌을 감수해야 했다. 그날도 칠판을 멍하게 바라보며 애꿎은 분필만 꽉 쥐며 떨고 있었다. 수학 천재는 시간 그만 질질 끌고 단상 앞으로 나오라고 빈정거렸다. 주인공은 나뿐만 아니라 대여섯 명이 늘 함께 했다. 우린 수포자 동지인 셈이었다. 아이들을 일렬로 세운 선생님은 울상 짓지 말고 웃으라고 했다. 가장 크게 웃는 놈은 고통을 덜 느끼게 해 줄 거라고.


나는 순진한 아이였다. 눈치는 빨라 먼저 맞는 아이의 유형을 분석했다. 눈썹을 살짝 추켜올리며 선생님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 다소 희미하고도 비열한 목소리였지만 말이다. 그는 강자로서 협박을 하고 있었다. 웃어야 덜 아플 거라고 그리고 팔을 인정사정없이 휘둘렀다. 우린 정확히 세대씩 맞았다. 틀린 건 한 문제였는데 왜 세대를 맞아야 하는지 그것도 한쪽 뺨만 시뻘건 색으로 물들도록 맞아야 하는지 몰랐다. 문제는 맞아도 웃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웃음을 그치면 대가로 매질이 늘어나는 사실 때문에.


세대씩 맞으면 하루 종일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 날이 꽤 많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 문제를 풀지 못한 내 모자람에 화 나가기도 했지만, 비굴하게 웃었다는 게 용서가 되지 않았다. 그런 날이 1년 동안 유지될 거라 생각하니, 앞으로 얼마나 더 웃어야 하는 건지, 트라우마로 내 얼굴에서 미소가 영영 사라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그럼에도 나는 하회탈처럼 웃었다. 울거나 좌절하는 건 그가 이기는 길이라고 믿었기에, 더 당당하게 맞섰다. 교무실에서도 야간 자율 학습시간에도 그와 마주치는 모든 상황에서 나는 일부러 웃었다. 그에게 지지 않기 위하여, 더 웃는 수단으로 발악했다.



그때부터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겼다. 어떤 최악의 상황이라도 웃어 버리는 거다. 아버지 사업이 망하여 몇 달 동안 빚쟁이들로부터 도망쳐 다닐 때에도, 입대 하루 전에 영장이 도착하여도, 유격훈련 때 똥물을 실컷 들이마셔도, 사업하면 기꺼이 도와주겠다던 사람들이 등을 돌려도, 10개월 동안 급여를 받지 못해 치킨 한 마리조차 사 먹을 여유가 없어도, 사업이 망해 빚더미에 앉아도 웃으려 했다. 웃음을 잃는다는 것은 마치 지구 최후의 날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거라 생각했기에.


슬픔을 극복하려고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반대로 행동을 한 걸까? 웃는다고 당장 현실이 바뀌는 건 없겠지만,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려는 내적인 움직임이 더 활발해지지 않을까? 과연 웃음으로 비관적인 상황을 덮으려는 행동은 의미가 있었을까? 낙담한 나머지 방바닥에 드러누워 신세 한탄을 하고 있어도, 지인이 전화라도 걸어와서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미는 일은 물론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뻥 뚫리게 한바탕 웃어버리는 거다. 웃으면 적어도 자기 비하나 인생 망했다고 자빠져 있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연구에 의하면 사람은 타인과 함께 있을 때, 30배 더 웃는다고 한다. 아마도 타인이 경계심을 허물도록 유도하고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겠다는 긍정 신호일 것이다. 웃음이 타인에게만 위력이 있을까? 타인을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위기조차 즐기는 자세로 넘어보겠다는 '나의 의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내 인생엔 늘 불행한 사건만 터진다고, 난 빈곤한 인생이라며 신세 한탄을 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자책하는 모습은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까? 허약한 마음이 들통난다고 가정해보자. 타인은 도움을 주는 것보다 무관심으로 응대하거나 당신을 질투하는 사람이라면 손가락질까지 해댈 것이다. 당신을 위한다면 아프더라도 웃을 필요가 있다. 웃음은 신체의 장기와 근육을 강화시킨다. 면역력을 높여주며 스트레스를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웃는 행동이 신체의 자정 활동을 도움으로써 갈등의 상황까지 호전시킨다는 것이다. 억지로 웃는 것도 상관없다. 웃기 시작하면 변화의 역사가 시작될 테니. 안 된다고, 난 늘 망하기만 한다고 남 탓을 하거나 삶을 부정하지 말고, 웃으며 비루한 현실을 바꿔보자.



우리는 수많은 실패와 절망을 겪는다. 대학 입시에서 좌절을 겪기도, 직장에서 원하지 않는 퇴사를 당하기도, 승진을 못하여 만년 과장으로 지내기도, 애인에게 이유도 없이 이별을 통보당하기도, 공모전에서 매번 탈락하기도, 실패를 겪을 때마다 절망만 하지 말고 농담 한마디라도 스스로에게 건네보자. 피식 웃고 나면 용기가 다시 생길지도 모를 일 아닌가. 나약한 사람은 시련 앞에서 좌절하지만, 당신처럼 내면이 단단한 사람은 비극을 승리의 역사로 바꿀 주인공이 된다. 그 어떠한 시련의 기억조차 성취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인간의 잠재성은 고통조차 웃음으로 승화시킬 만큼 한계가 없다. 니체의 말처럼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는 사람은 절대 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두려움을 용기와 도전으로 역전시키는 에너지는 웃음에서 시작된다. 자, 웃어보자. 웃음이 당신의 역사에 밝은 페이지를 새길 것이다.




내일(01/13) 오전 11시에는 Peter Kim 작가님께서 '인사이트를 얻는 인풋 소스 XX가지'를 나눕니다. 「함께 쓰는 성장의 비결」 매거진에서는 첫 글로 '당신의 인풋은 안녕하십니까'를 썼죠. 매거진 멤버들이 인사이트나 정보를 주로 얻는 인풋 소스를 정리해서 소개해주신다고 하니 많은 관심 부탁드릴게요.


나이도, 직업도 다양한 7명의 작가들이 펼쳐내는 성장 스토리, <함께 쓰는 성장의 비결>은 매일 오전 8시에, (주말에는 오전 11시에) 발행됩니다. 그 내용이 궁금하다면, 매거진 구독을 눌러주세요. 한 뼘 더 성장할 여러분의 꿈을 응원합니다.





[참고] 웃음으로 뇌를 밝혀라 BRAIN 5, 2007.7, 40-43 (4 pages) 한국 뇌과학연구원 KOREA INSTITUTE OF BRAIN SCIENCE


매거진의 이전글 멘토는 그저 거들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