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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r 31. 2019

오늘, 당신의 감정 날씨는 어떤가요?

3/25(월) ~ 3/31(일) 정리

일주일 간의 감정 일기를 정리해봅니다.

일주일의 감정들
감정 곡선

3/25(월) 지루함


새벽 공기를 가르며 집을 나섰다. 한 달에 한 번 뿐이어도 피곤함은 이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세미나는 옵션이 아니었다. 아침잠이 많은 나에게 곤욕이었다. 잠은 양보의 주인공이 아니다. 작은 공간에 사람을 몰아넣고 발표와 토로가 시작됐다. 환호와 아우성, 두 가지 교성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시야가 벌건 걸 보니 가득한 피곤을 증명했다. 눈앞에 팥빵 하나와 딸기 우유 한 팩이 놓였다. 이것은 벌인가? 상인가? 
 
노트를 펼쳤다. 들리는 것, 보이는 것, 생각나는 것을 모조리 적었다. 지루한 시간을 회피하는 법,이라고 나도 모르게 형체가 불분명한 문장 하나를 완성했다. 불협화음 같았다. 생각을 수집했으나 정리되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저분할 뿐이었다. 
 
따분한 일과 바쁜 일 사이에서 나는 방황했다. 신은 나를 동정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침묵으로 응수했다. 아니, 엄밀히 말한다면 항변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논리는 무음이었고 무거운 공기가 대신 차분하게 행과 열을 맞추었다.



3/26(화) 만족


퇴사 선포식(?)이 끝난 후, 집중력을 완전히 잃었다. 마음이 콩밭을 쳐다보고 있는데 일이 굴러가겠는가. 그럼에도 퍼뜩 정신이 들 때가 있다. 마감이 서늘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진행 중이던 회사 프로젝트도 마감이 임박했지만, 주말마다 예정된 개인 일정도 머릿속을 들쑤신다. 게다가 4월부터는 새 글쓰기 모임도 꾸려야 한다.


휴식 없는 삶이다. 오래 쉴 미래의 순간을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을 비축하는 거라 우겨본다. 바쁘지 않으면 공허와 무력감이 찾아올 테니 무언가에 시달리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낮에는 격무에 시달리고 밤에는 내 일을 찾아 헤맨다. 하고 싶은 일은,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활동을 소모하더라도 휴식이라 정의할 수 있다. 쉬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도식의 삶을 지칭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니 난 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을 담금질해야 한다. 기관이 녹슬지 않도록.


큰 인기(?)를 끌었던 성장 매거진을 출간하기로 했다. 계약을 맺기로 결정하고 공저 작가님들의 계약 정보를 출판사 대표님에게 보냈다. 조만간 또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올 것이다. 어느새 내 삶이 글 쓰는 것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신기할 뿐이다.



3/27(수) 만족


미세먼지를 뚫고 거래처에 방문해야 했다. 집에서 거래처까지 2시간 이상이 소요됐다. 평상시 회사까지 40분 정도 소요되는데 2시간이라니 막막하기만 했다. 지루하다면 지루한 시간이겠지만, 흘려보내기에는 시간이 전하는 묵직함이 나를 엄숙하게 만들었다. 이북을 실행하고 김도훈 작가의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진지하게 읽기로 했다. 읽던 중 한 문장이 눈을 끌었다.

페이스북에 "이 나이가 되어도 성공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라고 썼더니 많은 댓글이 달렸다. “스스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면 성공한 것”이라는 답변이 있었다. “빚 갚는 것”이라는 댓글도 있었다. 가장 많은 댓글은 “하기 싫은 건 안 해도 되는 삶”이었다. 

그래 난 성공하고 싶다. 그의 말대로 나는 성공을 위해 '하기 싫은 것'과 얼마나 분리되어있는지 항변하듯 물었다. '하기 싫은 걸 무시하고 살 수 없는 게 인생이 아닌가? 문장처럼 간단하게 마음을 돌이키고 그것을 규율대로 믿고 따르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안되니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하기 싫은 것이 무엇인지 노트에 적어보기로 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 꼰대 같은 상사와 매일 직면하는 것, 회식자리에 강제로 끌려가는 것, 억지로 술 마시는 것, 술 마시면서 잔소리 듣는 것, 글 쓰지 않는 삶을 사는 것.

결국 글 쓰는 삶으로 귀결이 되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작가로서 성공하고 싶은지, 개발자로 성공하고 싶은지 명료해졌다는 것이다. 불행이 아닌 것은 또한 둘 다 하기 싫은 게 아니라는 얘기다. 다만 직장에서 하기 싫은 일을 통째로 떠맡아야 하는 직급의 무게가 싫은 것일 뿐. 일을 싫어하지 않는 것에 위안을 주고 싶었다. 난 어쩌면 이미 성공한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50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프로그래밍이 좋은 건 사실이니까. 책상 앞에 앉아 10시간 이상 꼼짝없이 코드에 파묻혀 있어도 코딩이 그냥 좋으니까.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펼치는 삶을 성공의 전제라고 일컫는다면, 세상은 실패한 자로 넘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기 싫은 일을 하며 버티는 중이니까. 나도 하기 싫은 것에서 벗어날 용기가 부족하다. 그래도 괜찮다고 스스로 말한다.

우리는 새벽에 일어나 가끔 2시간이 넘는 원거리를 이동해야 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과 불편하지만 섞여야 한다. 그렇게 치열하고 때로 어색하게 사는 것도 인생이니까, 살아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특혜니까. 그래도 하기 싫다고 불평불만을 던지거나, 덜 하기 싫은 일이라고 안도의 한숨이라도 크게 내쉴 수 있으니, 우리는 축복받은 셈이다. 미세먼지 세상 일지라도 미소 지어 보는 거다.



3/28(목) 슬픔


어제,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공교롭게도 장례식장에서 친구를 세 번째 만난 셈이 됐다. 우린 무엇이 그리 바빠 삶의 최전선에 다다라서야 얼굴을 맞대고 앉을 수 있었을까? 한 상 즐비하게 차려진 음식, 친구의 처진 눈망울, 검게 가라앉은 공기가 말을 가로막았다. 침묵이 우리의 슬픔을 다독거렸다.

친구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다 '슬프지? 상심이 클 거야' 이런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기껏 내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어쩌면 우리는 사실에서 멀찍이 떨어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묵힌 이야기를 꺼냈다. 만날 때마다 하는 그런 흔한 이야기들, 무용한 이야기들, 한계에 직면하게 되는 이야기들, 그땐 왜 그랬을까? 우린 서로를 잘 몰랐던 거야.

시간의 고개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정도는 넘어야 우린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번 생에 그런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그래도 미래가 남아 있으니 덜 슬픈 걸까? 철 지난 이야기나 나누면서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교정했다. 종로에 사는 그 친구, 퇴사하기 전 꼭 만나야겠다. 더 이상 죽음이 존재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야겠다.



3/29(금) 기대


글쓰기 모임 오프가 내일이다. 지난주 금요일엔 어드밴스드 2기 9주 과정을 마쳤고 화요일과 목요일에 베이직 3기 과정도 종료됐다. 모임이 끝나면 모처에서 모임을 갖는다. 필수는 아니지만 웬만하면 모이려고 한다. 지금까지 오프를 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으니까. 
 
2018년 10월, 첫 오프가 생각났다. 아무런 계획 없이 만나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카메라에 장면과 영상을 기록하여 유튜브에 업로드까지 했지만, 지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개성을 갖추지는 못했다. 콘텐츠가 없었다고 할까? 궁금했던 사람을 만나 근황을 묻고 서로에게 글쓰기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으니까. 
 
3 기수가 끝나 오프를 갖는다니 시간이란 녀석, 어느새 어슬렁어슬렁 지나가는구나. 발표 자료를 보완하고 내일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점검했다. 난 개성을 갖추었을까. 글쓰기 모임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걱정 반 기대 반 속에서 나는 방황이 아닌 여정 중이라고 생각해본다. 기대감이 어둠을 꽉 채웠다.



3/30(토) 감사


봄답지 않게 쌀쌀한 기운을 머금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끝나간 겨울이 돌아오려는지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길가에 가득했다. 긴장했을까? 깊은 잠과 상관없이 밤새 뒤척이다 이른 아침을 맞았다. 삼각대, 이벤트용 책 6권, 노트북, RGB 젠더, 프리젠터, 휴대용 배터리를 가방에 넣으니 꽤 묵직했다. 어깨에 둘러매니 허리가 부담스럽다고 하소연을 늘어놓는듯했다. 
 
세 번째 기수가 참석하는 공식적인 오프 자리였다. 비와 눈이 오락가락하는 날씨를 헤치고 4분이 현장에 도착했다. 감사했다. 화요일 클래스 4분, 15분 발표를 맡은 이전 기수 2분, 나를 포함하여 총 7명이 3시간을 함께 했다. 어색한 인사를 짧게 나누고, 10주 동안 각자에게 쓰는 것이란 어떤 의미였는지 짧은 소회를 나누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했던 것은 '치유'라는 단어였다. 한 목소리로 글쓰기 체험 덕분에, 이해하지 못하던 자신의 삶과 깊은 내면까지 위로할 수 있었다고 외쳤다. 치유의 경험이 내 소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반가웠다. 글이라는 매개체로 우리는 공감을 나누고 있었다. 
 
글쓰기 모임을 시작한 지 30주가 지났다. 카페에 글쓰기 관련으로 가입한 분이 이제 68명을 넘어섰다. 사람은 숫자에 참 민감한 존재다. 어떻게 숫자를 올릴지 그 높음을 걱정하는 것보다, 한 분을 얼마나 한 공간에 오래 머무르게 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할 때다. 그것이 내가 퇴사하고 글을 쓰는 삶을 살아가려는 목적 중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3/31(일) 평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지적당하지 않는 아침이 평화롭다. 쌓인 피로를 날려버리기 위해 나는 아침을 걸렀다. 눈을 뜨니 많은 시간이 지나 건너편에 서성이고 있었다. 빛은 있어도 세상의 것이지 내 소유는 아니었다. 
 
어떤 일이든 잠시 유예당하고 싶었다. 관찰당하는 삶에서 한걸음 물러나 시선을 차분하게 내려보는 것도 좋을 테다. 봄은 개화를 시작하다 뒤로 물러섰다. 누군가 놀래기라도 한 걸까? 당신의 시샘이 부끄러워 봄이 도망치기라도 한 건 아닐까? 
 
한 글자라도 남겨 보려고 책상 앞에 다가섰다. 감정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아니, 정리되지 못한 감정을 말린 빨랫감처럼 차곡차곡 쌓아놓는 일이야말로 다음 아침을 위해 해야 할 작업이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는 단순한 일부터 처리하는 게 좋다는데, 자꾸만 창밖으로 시선이 흘렀다. 차라리, 빗방울이라도 쏟아지면 얽힌 것들이 풀릴 것만 같았다. 
 
난 지금 평화로운 걸까? 평화롭고 싶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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