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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pr 27. 2019

나는 글벗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나는 글쓰기라는 작은 우주에서 ‘온라인 합평’이라는 세계관을 열었다.

“작가라면 맞춤법은 기본이에요. 수동태보다 능동태로 위주로 쓰세요. 복수보다는 단수를 쓰시고요. 주어와 술어를 호응시키세요. 작가를 드러내는 ’나’를 습관적으로 쓰지 마세요. 번역체처럼 쓰지 마세요(~를 통해, ~ 할 수 있다, 생각한다.). 부사는 자제하세요. 형용사보다는 동사를 활용하시고요. 감정은 제발 절제하세요. 단문으로 쓰는 습관들이시고요”


수업이 끝나면 관성적인 시선으로 문장을 검열하곤 한다. 피드백을 남기고 문장을 다듬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적용하는 규칙이 존재한다. 이런 철칙은 어디에서 나타났을까? 글쓰기 교본을 열댓 권 이상 탐독하고 글쓰기 현장의 경험이 기록된 논문을 읽고, 유명 작가에게 목돈을 지불하며 실전 감각을 익혔기 때문일까?


실수 없이 실전에 임하려면 기초부터 탄탄하게 다지는 것이 글쓰기 선생의 본분이라 믿었다. 익힌 대로 지적했고 누군가에게 가르침 얻은 대로 교정했다. 내가 터득한 모든 기술적인 노하우를 전달하려 했다. 공유의 정신을 생각하며 말이다.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건 독자적인 세계관을 형성했다. 곧잘 쓴다고 하여 가르치는 데 탁월한 성과를 내는 것도 아니고, 못 쓴다고 하여 남을 가르치지 못한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 쓴 글의 마지노선은 어디쯤일까? 교과서처럼 정석대로 쓰기만 하면 독자가 좋아하는 글로 변신하는 걸까?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을 필사하면 글이 어제보다 나아질까? 책 한 권을 통째로 베껴 쓰면 작가를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을까.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것이 먼저일까, 자기만의 색채를 찾게 하는 것이 먼저일까. 문장을 말끔하게 다듬는 것이 험난한 글쓰기 정글을 통과하는 비결이라 여겼지만, 그 방법이 관문에서 헤매지 않는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도 던져졌다. 단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도록 글벗을 이끄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선생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도 하며.


매주 화, 목, 금 밤마다 글쓰기 수업을 열고 있다. 타인의 삶을 경청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고, 각자의 숨겨진 이야기를 발굴하고 자신감 있게 낭독할 때를 겸허히 기다렸다. 노트를 열고 어떤 감상기를 전해야 할지 글을 읽고 또 읽고 메모를 남겼다. 글벗의 삶이 담긴 문장을 체험하고 있노라면, 구경꾼의 시선은 사라졌다. 나는 주인공과 관찰자의 시선을 넘나드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2018년 8월부터 글쓰기 수업을 시작했으니 곧 1년을 맞는 셈이다. 나는 글쓰기라는 작은 우주에서 ‘온라인 합평’이라는 세계관을 열었다. 시간적 여유가 없는 글벗들을 위하여 밤마다 시간을 재창조해야 했다. 글벗들과 어떻게 합평을 나눌 것인가, 합평이라는 말만 들어도 얼어붙고 마는 글벗들의 귀와 입에 어떻게 불꽃을 피울 것인가, 고민했다. 나는 글쓰기 선생으로서 무난하게 안착하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혹시 내 감정에 거품이라도 낀 것은 아닌가.



글쓰기 모임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성장했다. 유입된 사람들로 범람하는 듯해도 가끔 고비가 암초처럼 자라나 순항을 방해하기도 했다. 문득 합리적 의심이 찾아오기도 했다. 내 피드백이 객관적인가, 굶주린 그들에게 포만감을 줄 수 있을까, 아니 그들이 두려움과 혼돈의 껍질을 뚫고 잠재성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견인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수업에 임했다. 일도 내가 저질렀고 수습도 내 담당이었다. 시작이 운을 떼면 행동이 뒤를 담당했다. 마음도 행동에게 의지하며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글쓰기 선생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글쓰기 정석에 따라 지적질할 포인트를 찾아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들의 오랜 습관을 버리도록 유도하는 게 제 역할일까? 비문으로 뒤섞인 문장을 모범 사례라도 삼듯 친절하게 교정해주는 게 제 역할일까? 칭찬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폭풍 갈채라도 실컷 안겨주는 게 제 역할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문단을 구조적 단위로 분개하여 얼개를 재구성하고, 흐트러진 논리를 세워주도록 첨삭하는 게 제 역할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진득하게 책상 앞으로 몸을 이끌도록 쓰는 습관을 길러주는 게 제 역할일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수업에 임할 때마다 내가 던지는 말 한마디가 ‘왜 글을 써야 하는지’ 근거를 찾고 그들의 얼어붙은 관념의 체계를 활성화시키길 바란다. 글을 쓰는 행위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만한 것이며 무디어진 사유의 감각 역시 날카로워진다는 걸 경험하게 하고 싶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넓힐 수만 있다면, 글쓰기 모임을 시작한 낸 초심에 명분을 안길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는 8주 또는 몇 달, 아니 1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 글쓰기가 분주한 삶에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나에게 자랑할지도 모른다.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누군가의 삶에 진지한 이야기를 만드는 기폭제가 되길 소원해본다. 그리하여 내가 타인의 글을 읽고 겁 없이 비평하겠다고 뛰어든 무모함을 덮어주길 바란다. 글벗들이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삶을 억지로 포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빛나고 있음을 인지하기 바란다. 감추고 싶은 허물조차 당당히 드러낼 수 있다면. 삶은 오랜 불면증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를 얻은 나머지 오늘은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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