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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n 05. 2019

당신의 뒷모습은 어떠신가요?

하마터면 노비가 될 뻔 했다.


긴급 알람에 눈이 떠졌다. "빌어먹을, 누가 내 소중한 늦잠을 방해한 거야?" 소리의 진앙지는 다름 아닌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회사의 단톡방이었다. 분명 무음 처리했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눈을 떴을 뿐이고, 내 얼굴은 핸드폰 잠금을 해지했을 뿐이고(안면 인식), 내 손가락은 단톡방으로 미끄러졌을 뿐이고. "귀신 씻나락 까먹는... 아니 카톡 무음 씹어먹는 소리가 아닌가."


"데이터***에서 오류 메시지가 계속 뜨고 있어요. 확인 부탁드려요"


동물적인 감각이란 게 참 무섭다. 단톡방 알람을 꺼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예감으로 메시지를 확인하고 만 것이다. 묘하다. 알람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한참 자야 할 시간인데 왜 나는 눈을 뜨고 단톡방을 들여다본 걸까? 게다가 확인하지 않으면 숫자 1도 줄어들지 않았을 텐데. 그냥 슬쩍 지나쳐버릴 수도 있었는데, 책임감이란 것이 나를 여전히 직장에 붙들어두게 한다. 진정한 해방이란 아직 멀었나 보다. 칼같이 관계를 잘라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 단톡방 탈출 - , 끊을 수 없는 인간관계라는 것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구나.


눈도 비비비 않고 일어나 책상 앞으로 바로 튀어갔다. 아니 날아갔다는 표현이 훨씬 섬세할 것이다. 의자 위에 슬라이드로 몸을 얹히고 굴리듯 또는 스치듯 노트북 전원을 밀었다. 노트북에 빨간 불이 깜빡거리자 심장이 쿵쾅거려 미칠 것 같았다. "에러 메시지라고? 내 인생이 에러다 에러!" 나도 모르게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비밀번호 입력을 단 한 번에 마치고 - 평상시에 한 세 번 틀린다 - 패러렐즈를 실행하며 원격 OS를 가동하고 동시에 리모트 데스크톱으로 서버에 접속했다. 역시 난 멀티플레이어였다. 오른손 하나로 동시에 세 가지 짓(?)을 하고 있다니, 나의 민첩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개발 툴을 켜고 문제가 될만한 부분을 정확히 1초 만에 찾았다. 과장이 아니라 그 순간에 정확히 1초의 시간만 흘렀다. 컴파일을 마치고 실행파일을 서버에 업로드했다. 단톡방에 에러를 교정했음을 알리고 왜, 어떤 사유로 문제가 발생했는지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 모든 작업을 마치고 나니, 꿀 같던 늦잠은 사라진 상태였고, 햇살이 거실 정중앙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사건(?)이 정리되자 내 신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나는 분명 퇴사했어. 맞아. 그 회사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잖아. 대체 뭐한 거지? 왜 쏜살같이 대응을 해준 거야. 조금 미적거려도 됐을 텐데" 



"유종의 미"


"저 같으면 이사님처럼 절대 일 안 해요. 관두시는데 무슨 GS인증까지 책임지시고, 어차피 나가면 배신자 되는 건 똑같아요. 나가는 순간, 어차피 배은망덕한 인간 된다니까요. 저 같으면 바로 사표 쓰고 나가버려요."


그래, 나에게 조언인지 충고인지 마지막 말을 남긴 후배를 이해한다. 나가는 마당에 남은 일을 도맡고, 그것도 성실하게 처리해주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 어차피, 그만두면 인연도 끝나는 법이긴 하다. 하지만 계약의 성립과 종료로 설명되지 못하는 일도 있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내 마무리가 더러운 사람으로, 누군가에게는 끝까지 책임을 다한 멋진 사람으로 각인되지 않을까.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긍정적으로 봐준다면, 배은망덕한 인물로 기억하는 사람이 다수일지라도 아름다운 퇴사를 위해 뛰어다녔던 내 노고가 헛되지 않지 않을까?


회사의 정치하는 것이 멀쩡한 사람을 싸움 군으로 만들기도, 비겁한 도망자로 몰아가기도 한다. 퇴사한 나는 도망자 내지는 패배자로 기억될 확률이 높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해야 할 일을 짐을 꾸리고 나가는 최후의 스퍼트 순간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퇴사 후, 크게 내 일정을 해치지 않는다며 기꺼이 집에서라도 지원하고 있다. 일이란 것이 철저한 계산 결과인 이익과 손해로 치부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마지막에 '성실과 책임'이라는 단어에 집중한다. 그것이 내가 맡은 책임, 자식 같은 '일'과 남아서 기간 내에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언제 어디서 우리는 다시 만나 새로운 인연을 꾸려 갈지도 모르니.


메일 한 통


안녕하십니까? TTA 소프트웨어시험인증연구소입니다.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드리며 GS인증(1등급) 획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귀사의 적극적인 협조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퇴사를 지지부진하게 막아섰던 'GS 인증'결과 통보였다. 게다가 1등급이라니. 한 시름을 덜어냈다. 내 퇴사가 아름다운 그림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도망자 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나를 붙잡으려고 혈안이 됐던 '추노꾼'들은 단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시 필사 모임 5기 모집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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