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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19. 2019

생애 첫 백일장 도전기

아무말 대잔치

백일장에 처음 도전했다. 처음 도전에 입상을 바랐다면 도둑놈 심보겠지만,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도전 직후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인공지능 시대에 300자 원고지가 웬 말이냐, 난 띄어쓰기가 젬병인데 말이지. 브런치 에디터 없이는 한 글자도 완성할 수 없다고.", "난 키보드로 글을 써야 한 번에 2천 자 쓰는 사람인데 손구락 부러지게 연필은 또 뭐여" 하여튼 나는 안 될 확률을 무게추에 얹고 있었다.


손으로 글을 쓰는 거, 학창 시절 연애편지 쓴 것을 마지막으로 이제 너에게 화형을(?) 선고한다. 그래, 내 인생에 앞으로 손으로 글을 쓰지는 않겠다. - 아, 맞다, 필사는 제외하고 - 손글씨로 쓰는 창작은 없다고 정정한다. 


참으로 막막했더랬다. 입장하는데 왠열 공책을 한 권씩 나눠 주더라. 초딩 방학 때 '탐구생활' 여는 기분으로 펼쳐보니 300자 원고지 뭉치(?)였다. 200자도 아니고 300 자라니 근본 없는 자식이 아닌가. 나름 참여자를 배려한 것 같았다. 긴 글을 쓸 인간을 위한 주최 측의 배려겠지. 이왕 배려하려면 노트북이라도 한 대씩 준비해주면 참 좋았을 텐데.


뭔 백일장을 진행하는데, 지역유지, 국회의원, 이름도 모르는 문인 협회, 백일장을 주최한 가문의 유지까지 한 사람씩 나와서 기념사를 거들었다. 위원장 양반의 소개와 축사까지 40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 슬슬 불편한 심기가 끓어오르던 찰나 대각선 뒤쪽에 앉은 '아주머니 열사'가 한 마디 외쳤다. "집안 잔치는 너희들끼리 모여서 하라고, 40분씩이나 사람 기다리게 하냐고" 그 아주머니는 800명의 울분을 대신했다.


우여곡절 끝에 백일장 글쓰기는 굴러갔다. 글제 5가지를 제시했다. 예상한 글제가 나왔지만 역시 손으로 글을 전개하는 건 무리였다. 백지 한 장에 어떤 내용을 쓸지 개요를 잡았지만, 손으로 정리한 내용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시 마인드맵이나 노션을 이용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원고지에 글을 쓰는 과정이었다. 원고지 칸에 맞게 띄어쓰기를 나름 마치면, 수정할 녀석이 수도 없이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지우개로 지우기를 수십 차례, 원고지는 너덜너덜, 내 마음은 덕지덕지, 지우개는 울퉁불퉁 지저분하게 변해갔다.


지난 토요일에 벌어진, 내 생애 최초의 백일장을 정리하며 나는 편하게 글을 쓰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키보드를 손가락으로 따닥따닥 두들기며 생각을 글로 옮긴다는 것이 얼마나 손쉬운 일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 쉬운데 글은 왜 못 썼을까. 손가락을 부러뜨리기라도 해야겠다. 비문을 고치기도, 어색한 문장을 다듬기도, 문단을 통째로 옮겨 붙이기도 얼마나 간편한 일이었는지, 지금 이 순간 키보드에 감사 인사라도 드리고 싶다.


첫 백일장은 실패로 끝났지만, 다시 도전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는 문명의 이기인 '키보드와 모니터' 친구와 더 친밀하게 지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디지털 백일장이 개최된다면 한 번쯤 나가볼 의향은 있지만서도. 


저와 긴밀하게? 소통하고 싶은 독자분은 아래의 글을 참조해주세요.

https://brunch.co.kr/@futurewave/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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