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글쓰기 강사라는 명함을 들고 문화 센터에 가끔 나간다. 첫 시간이면 수업에 참여한 목적이 무엇인지 자기소개를 하라고 뜬금없이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데. “언젠가 작가가 되고 싶어 왔어요”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진 종족도 있지만 “글쓰기가 대체 뭔데요?”라는 대답으로 내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종족도 찾는다. 작가라는 원대한 꿈을 꾸는 사람, 글쓰기가 대체 뭔지 모르겠다고 수강 신청부터 당장 취소해달라고 따질듯한 사람, 그 가운데 대체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란 말인가.
땀나는 자기소개 시간으로 이십 분을 때우고 일방적인 글쓰기 쇼를 진행한다. 어쨌든 돈을 받았으니까, 듣는 사람의 목적에 상관없이 나는 1시간을 떠들어야 한다. 중간에 하품하는 사람이 가끔 보이지만, 그들에게 분필을 던질 수는 없으므로 아재 개그를 던지거나 시답지 않은 농담을 펼치며, 시간아 지나가라 제발 빨리 지나가라 주문을 외운다.
한 시간이 겨우 지나면 휴, 하고 한숨을 크게 쉬고 실습을 진행한다.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오느라 힘들었다고 하소연하는 사람, 노트를 주섬주섬 꺼내는 사람, 내 눈을 멀뚱하게 바라보는 사람을 뒤로 한다. 첫 시간의 과제는 “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는 거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글을 쓰냐고 따진다. 혹시 환불해달라는 얘긴가. 한 글자도 못쓰겠다고, 계속 쓰라고 강요하면 문을 박차고 나가겠다고 협박이라도 할 태세다. 이제 10분밖에 안 지났는데 말이다. “문은 아까부터 열려있어요”라고 외치고 싶다. 당신도 모르는 당신을, 글쓰기 강사가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나란 무엇인가, 라는 비교적 쉬운(?) 주제에 다들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뭘까. 나로 살면서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현상은 언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걸까? 우리는 언제부터 꼬여 버린 걸까. 인생의 주인은 당신이 맞는지 물어보고 싶다.
우리는 '나'라는 가면을 쓰고 산다. 직장인, 학생, 교수, 남편, 아내, 강사, 작가, 수강생이라는 각양각색의 페르소나가 마음 옷장에 가득하다. 오늘 아침엔 어떤 페르소나를 써 볼까? 이걸 걸쳐보고 저걸 걸쳐봐도 내 얼굴에 맞지 않다. 고심 끝에 선택한 배역이 불만스럽지만 만족스럽다고 거짓말하며 살아야 한다.
글쓰기는 우리가 가진 온갖 페르소나를 마주하게 한다. 그동안 얼굴에 쓰고 다닌, 내 것이 아니라 믿은 페르소나를 눈앞에 들이댄다. 외면하고 싶지만, “바로 이게 네 것이야"라고 벗고 싶어도 안 된다고 명령한다. 글쓰기는 ‘진정한 나’란 무엇인지 알듯 모를듯한 나를 자각하게 한다. 과거의 나, 현재의 나를 연결하고 미래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총체적인 대답을 원한다.
나에게 가까이 다가서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두 가지가 분명해진다. 이것은 나를 올바로 인식하는 첫 번째 단계다. 생각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지만 글쓰기로 나를 대면하는 건 유효기간이 없다.
글을 쓰면서 당신도 나처럼 나를 찾길 바란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견딜만한 페르소나를 짊어졌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고 믿는다. 글을 쓰면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게 된다. 군말은 필요 없다. 써보면 안다. 다만, 꾸준함이 비결이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 무엇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면 일단 부딪혀보라고 말한다. 니체는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고 말했다. 사람은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나를 극복해야 한다. 단 전제는 나를 알아야 한다는 명제가 앞서는데, 그 명제의 해답은 글쓰기가 준다. 자,작가라는 페르소나와 함께 이제 당신을 극복해야 할 시간이다.
(여러분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