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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pr 30. 2020

나는 환자다

일상 에세이

몇 개월 만에 만나는 지인들마다 한입으로 외치는 소리가 있다. "아니 완전 딴 사람이 되셨어요." "살 너무 뺀 거 아니에요?" "아파 보여요. 얼굴이 핼쑥해지면 환자처럼 보인다니까요" 이런 걱정이 섞인 비명을 들을 때마다, 나는 별다른 변명을 늘어놓지 못하는 편이다. 거울에 내 얼굴을 비쳐봐도 환자가 된 기분이 간혹 들긴 하니까.


환자 같아 보여서, 정말 환자로 살 것만 같아서 살기 위해 살을 덜어낸 것뿐인데, 환자라는 소리를 들으니 아이러니한 노릇이기도 하다. 뭐, 지인들이야 오랜만에 보는 경우가 많으니까. 어색한 순간에 내밀만 한 화제가 빈약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을 테니, 그런 오고 가는 말들이 충분히 수긍하고도 남음이지만.


목표를 세우면 웬만하면 지키려고 노력하는데, 다이어트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지독한 마음을 품고 죽기 살기로 노력하지 않으면 달성할 수 없는 것이 다이어트의 끝이라는데, 난 그 어려운 걸 두 번 해냈다. 첫 번째는 요요가 닥치는 바람에 실패하긴 했지만, 꽤 목표한 선까지 근접했더랬다. 그러다 다이어트고 뭐고 치킨에 심취해 살다, 각종 지표가 급격하게 나빠지는 걸 보고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했다고 할까.


그런데 그 다이어트라는 게 늘 강력한 생활 습관의 개선을 요구한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오래달리기를 하다, 거품을 물은 채 죽음의 경계까지 닿아본 사람으로서, 제발 제약회사들이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맞게 나같이 게으른 사람을 위해 꿈의 신약을 개발해 주길 바랐다. 알약 하나만 먹으면 다음날 홀쭉해지는 완벽한 그 무엇. 죽음의 직전까지 경험한 사람이, 그런 사슬에 두 번 엮이긴 싫었을 게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문제는, 어차피 실패할 것이 뻔하니 식욕 본능을 더 폭발시키며 스트레스를 풀어버리자고 자포자기하는 상황까지 초래한다.


그러다, 간헐적 단식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먹은 음식의 총량을 생각하면 이제 좀 줄이는 것도 이 나쁘지 않겠다는 사피엔스로서의 지적인 논리까지 들이대며. 2019년 여름부터 간헐적 다이어트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탄수화물이든, 단백질이든, 따로 구분하지 않고 정해진 시간만큼만 먹었다. 먹는 시간은 부자로 굶는 시간은 빈자로 지냈다. 운동은 약 20분에서 30분 가까이, 유튜브의 홈트레이닝을 따라 했다. 말하자면 다이어트는 질기며 긴 싸움이 아닌가. 다이어트는 단기간에 끝낼, 만만한 적수가 아니다. 오래도록, 지칠 때까지 대치가 끝나지 않는 싸움이 다이어트니까. 얼마나 오래 살지는 모르겠지만, 목표에 조금씩 근접한다는 생각으로 다이어트를 시작했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결론이 어떻게 됐냐고? 결론은 없다. 오직 과정만이 존재하니까. 하루에 20그램을 절감하든, 200그램을 절감하든, 달팽이가 야금야금 기어가듯 내 몸무게도 어느 시점으로 복귀 중이니까. 과거로, 도저히 돌아갈 수 없다고 규정지었던, 꿈같던 20대의 어느 시절로. 그러니까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휠을 천천히 돌린다. 조금씩 기억을 달래가면서, 욕심을 유보하면서, 익숙해질만한 시간을 나에게 배려해 준 채.


암사역에서 고덕동까지 걸어가면서 '나는 왜 죽도록 걷는 것에 집착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 건강해지고 싶다는 사소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단어에 나는 사로잡혀있는 중이다. 얼마나 멀리까지 걸어야 하며, 얼마나 빨리 걸어야 할지 모르는 싸움, 아니 시작도 끝도 없는 과정이라는 친구를 나는 매일 상대한다. 오래 지내다 보면 원수와도 정이 들지 모른다. 나에게 다이어트는 원수에서 다정한 이웃으로 바뀌는 중일 지도.


나는 환자다. 환자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환자는 아닐 것이다.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래서 조금이라도 나를 미워하는 마음에서 멀어질 수 있다면, 아니 나를 깊이 사랑할 수 있다면 이 순례의 고통을 오늘도 감당할 뿐이다. 먹는 걸 조금씩 줄이는 방법으로 나의 욕망의 총량도 같이 덜어낸다. 욕망이란 건 집착할수록 요요에 빠져들고 마는 실패한 다이어트 프로그램 같은 것이니까. 나는 지난날을 참회하고 내일을 경배하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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