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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r 19. 2020

오래된 세월이 묻은 당신의 그 무엇

슬픔의 기원


1

누군가 문을 슬며시 두드렸다. 문은 닫혔고 나는 단단하게 안쪽으로 휘감겨 있었다. 나는 온몸의 털을 세우고 마음의 모두를 작은 상자 안에 숨겨둔 채 문 뒤에 등을 기댔다. 숨을 쉴 수는 없었으나 간헐적인 동작으로 불길함을 바깥으로 내뱉곤 했다. 나는 얇은 가시에 불과할 정도로 나약했지만 그리스 신전의 기둥 수천 개를 모아놓은 것처럼 침묵의 형상으로 고정됐다.


문과 문 사이, 호흡이 사라진 공간에서 나는 내가 가진 여백의 반만큼의 소리만 허락했다. 어떤 소리가 문틈 사이로 흘러들어왔다. 마치, 아침 햇살이 창틈 사이에서 스며드는 것처럼 당신의 언어는 문틈 사이로 새어 나와 내 가슴에서 영롱하게 빛났다. 당신의 온기가 나에게 도달될수록 나는 더 견고한 기둥 행세를 했다. 하지만 귀는 열려 있어도 차단된 몰골에 불과했고 빛이 도달해도 앉을만한 구석은 하나도 없는 빈 그릇 같은 곳에 나는 서 있었다. 빛처럼 찬란하게 흡수된 당신의 언어는 노란빛의 잔치를 벌였다. 따뜻하게 흐르는 그 찬란함 앞에서 나는 미끄러지듯 당신의 세계로 포섭되어갔지만.


나는 냉정하게 연락을 끊은 사람처럼 밀실에 혼자 갇혔다. 슬픔이 시의 재료가 된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슬픔은 불쑥 나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세상의 모든 문 뒤에서, 등을 돌리고, 말을 숨기고, 표정을 감추고, 시가 만든 세상에서 보란 듯이 태어난 존재는 아니지만 슬프고 어두운 이야기를 털어낼 자격을 갖췄다고 거짓 근거를 댔다. 이 단 하나의 이유로써 나는 세상의 시들과 소통을 나눌 권리를 갖춘 셈이었다.


누구나 인생을 지배하는 자신만의 감정을 지녔으리라. 그 감정이란 너무나 오래된 세월이 묻은 당신의 그 무엇이리라. 나에게 그 무엇의 대부분은 슬픔이 차지할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서점에서 낡은 책 더미를 뒤지다 우연히 발견한 김용준의 《근원수필》 같은 것처럼,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어떤 슬픔은 내 인생의 절반을 넘어서는 보석이 될지도. 그러니까 그런 슬픔을 외면하는 행위는, 슬픔 기억 따위를 네 번 접어서 뒷주머니 속에 찔러놓고 잊어버리는 낡은 습관들과 비슷할지도. 혹은 슬픈 기억을 외면하기 위해 슬픈 영화를 보고 꾹꾹 눌러둔 눈물의 수도꼭지를 해제해버리는 것일지도.



2

어린 시절 외갓집 근처에는 작은 논들이 즐비했다. 여름밤마다 물놀이를 마치면 작은 평상에 걸터 앉아 옥수수, 감자, 고구마 따위가 담긴 바구니를 차츰 비워나갔다. 그럴 때마다 맹꽁이 우는소리가 마을을 가득 메웠다. 시인의 말처럼 비는 오지 않았으나 맹꽁이는 울음주머니에서 연신 물을 퍼 날랐다. 밤은 깊어가고 우는소리도 슬슬 쇠잔해갔지만.


필사 : 문태준 - 슬픈 생이 하나 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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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경 - 与論島

https://www.youtube.com/watch?v=KaeM8V35X30&list=PLPLGAwVuOMLrEw04bsx_LeEDAg0Fn-5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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