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y 05. 2020

에세이 잘 쓰고 싶어요

에세이에 관한 고찰

에세이는 내 생활을 다채롭게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릇의 크기는 다만, 한 끼 밥공기만큼만 가진다. 내 일상의 반경이 조명을 받아 글로 재생산하는 과정을 에세이가 맡는데, 하루 중, 수수하거나 하찮은 일과까지도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에세이는 내 삶을 관찰하는 행위이자, 적극적으로 나를 기록하는 활동이라 정의하겠다. 이러한 과정은 일기를 쓰는 것과 꽤 흡사하다. 하지만 일기와 에세이가 다르다는 건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안다. 그래도, 일기와 에세이가 다른 점을 살펴볼까? 차이는 비교적 단순한데 바로 '관점'이다. 일기는 나를 기준으로 삼고 볼 사람도 나로 제한한다. 다만, 에세이는 내가 기준이 되지만 볼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누가 내 글을 기꺼이 읽어줄 것인가. 그들을 위해 어떤 이야기를 담아야 하는가. 어떻게 공감과 울림을 전할 수 있는가. 어떤 이야기를 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암흑 터널을 통과하는 기분에 빠지는 것이 에세이의 영역이다. 에세이에는 작가만의 사유를 품어야 한다. 사유는 작가가 지닌 고유한 색깔을 나타낸다. 사유는 공감의 다리를 독자와 작가 사이에 펼쳐 놓는다. 그 위로 독자도 다니고 작가의 문장도 지나다닌다.


물론 우리는 에세이 쓰는 것을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작가가 되고 울림을 던지는 글까지 쓴다. 피천득 선생님이 그렇고 김훈이 그렇고 이병률도 그렇다. 그들은 천부적 재능 덕분에 통하는 에세이를 (잘) 쓰게 됐을까. 우린 언어 재능도 없고 정규 교육 과정도 거치지 못했으니 가능성은 제로일까?


에세이 쓰기, 일기처럼 쉬워 보이면서도 이병률의 에세이 히트작 《끌림》처럼 너무나 버거운 문제로 인식된다. 어차피 그들이 될 수 없으니 그저 나의 경험들을 여과 없이 나열만 해버리고 말까. 누구나 거칠만한 그저 그렇고 그런 이야기 같은 것들로. 평범한 이야기를 비범한 것으로 윤색할 능력이 없으니, 차라리 습관처럼 매일 쓰기만 반복하면 이병률처럼 끌리는 에세이를 쓸 수 있을까. 왠지 처지가 더 꿀리는 것만 같다.


우리는 이병률이 될 수 없다. 어쩌면 이병률의 아류작쯤은 될 수 있을지도. 다만, 쓰는 습관이 중요하다는 건 강조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쓸 것인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천 년 전, 《시학》에서 모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간에겐 두 가지 본성이 존재하는데 한 가지는 모방, 즉 남을 따라 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모방에서 얻는 즐거움이라고. 우리는 모방 전문가이며, 생존하기 위해 그렇게 오래도록 진화됐다. 모방은 타인의 삶을 배우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좋아하는 작가의 문체를 모방했다. 이병률 시인처럼 감성을 건드리는 시적인 문장을 따라 했고 피천득 선생의 “인연”처럼 여운이 오래가는 에세이를 쓰겠다고 덤벼들었다. 물론 그들을 따라 해도 나는 나, 자신일 뿐이다. 모방 작업에서 나만의 정체성, 고유한 그 무엇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피천득 선생님처럼 쓰고 싶다. 이병률처럼 쓰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궁금하고 당신도 궁금한 난제다. 도대체 잘 쓰려면 우린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 마음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는데, -어쩌면 돈까지 준비되어 있다. - 하지만 우린 그 방법을 모른다. 모르면 배우면 된다. 글쓰기 모임도 참여하고 필사 모임까지 신청한다. 심지어 글쓰기 책까지 모조리 섭렵한다. 왠지 고수가 된 기분이다. 책만 읽어서 고수가 된다면 이 세상의 고수 아닌 사람이 없겠다.


작가들의 문장을 열심히 읽는 건 좋았는데, 쓰려고 하면 막상 머릿속이 까맣다. 깔끔하게 기억이 소거된 것이다. 한 줄의 문장도 전개가 안될 정도로 답답하다. 머릿속에서 생각은 지나가는데, 내 것은 하나도 없다. 내 생각의 주인은 내가 맞을까?


깨달음을 얻는다. 역시 읽는 것과 쓰는 건 다르다. 밑줄까지 그으며 읽는다고 하여 이병률처럼 잘 쓸 수는 없다는 이야기. 뼈아픈 팩트에게 한 대 맞는다. "그래도 쓰자. 써보는 거야, 닥치는 대로 쓰자고." 심호흡을 가다듬고 구호를 크게 한 번 외쳐본다. 열심히 쓰다 보면 늘지 않겠냐고.


명로진 작가는 <베껴 쓰기로 연습하는 글쓰기 책>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베껴 쓰라고 말했다. 베껴 쓰라고? 내 글 쓰는 시간도 부족한데, 남의 글 따라 할 시간은 어디에서 만드나? 베껴 쓰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피식 코웃음을 쳤다. 메타인지가 꽤 낮은 시절이었다.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도 구분 못하는 시절을 살았으니 '쓴다'라는 단어에 행복하기만 한 시절이었으니.


글쓰기 초보 시절, 본능적인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깨달음은 부딪치고 깨지는 시행착오 없이는 나오지 않는다. 글쓰기 책을 수십 권 탐독하는 것, 타인에게 돈을 내고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터득했다. 그것은 '필사'라는 간단하고도 오래된 실천 명제였다.


에세이는 누구나 쓸 수 있다. 다만 생각을 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자주 문제가 생기곤 한다. 이 문제는 전 국민이 겪은 현상이라 정의할 수 있겠다. 나 역시 글을 쓰면서 늘 곤란을 겪는다. 어떤 단어를 사용할 것인가. 감성적인 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시적인 표현이란 과연 무엇인가. 역시 필사만이 살 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애쓰지 않아도 무엇이든 어설프게나마 비워 나가리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