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에세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검은 점퍼를 입은 아빠와 노란색 원피스를 여자아이가 언덕 위에 보였다. 아이는 파란색 킥보드에 발 한쪽을 걸치고 나머지 발로 바닥에서 계속 미끄러지고 있었다. 아빠는 아이와 킥보드를 동시에 붙잡았으나 불안한 기운은 없었으므로 놀이터에서는 잠시 동안 아빠와 아이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펼쳐졌다.
그러다 멀리서 초록색을 덧칠한 버스가 엔진 소리를 크게 울리며 시야 속으로 굴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빠와 아이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지각이라도 한 사람처럼 버스 정류장 앞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빠는 한 손으로 아이를, 나머지 한 손으로 킥보드를 지탱했다. 나는 멀리서 주먹을 움켜쥐고 응원하는 눈길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고 할까. 놀이터에서 정류장까지 뛰어가기에는 다소 만만치 않아 보였지만.
다소 모자라더라도 그만큼 아빠는 힘껏 뛰었으니까,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한 아빠였으니까, 나는 버스가 정류장에서 그들을 잠시 기다려줄 거라는 어떤 낙관적인 희망 같은 걸 품고 싶었다. 그러니까 버스는 뒷모습을 아빠와 아이에게 잠시 보여주면 그만일 뿐이었다. 단 5초, 아니 단 3초면 될 일. 기대와 달리 아빠와 아이는 정류장 앞에 조금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버스는 뒷문으로 몇 사람을 내려주더니 약속 시간에 늦은 사람처럼 쏜살같이 출발하려 했다. 아빠는 뒷문을 손으로 크게 두드렸으나 커다란 힘 앞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도 아이도 자신이 왜소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했을 뿐.
아이는 아주 커다랗고 길게 울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마도 세상에서 처음으로 어른에게 거절을 당했으리라. 커다란 기계 뒤에 숨은, 말하자면 자신보다 크고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부탁하지도 않은 검은색의 외면을 선물 받은 셈이었으니까. 받고 싶지 않은, 굳이 몰라도 되는 그런 선물.
나는 무한히 앞쪽으로 걸어가야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아이의 슬픔을 뒤로한 채, 역시 그 어른과 마찬가지로 뻣뻣한 고개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나와는 관계가 없었으므로 버스가 떠나가는 모양을 지켜보면서도 다시 뒤돌아서야 했으니까.
한숨을 크게 내쉬는데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세상의 슬픔은 어디에서나 살지 않는가. 슬픔은 어느 순간이든 닥쳐온다. 어른에게도 아이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슬픔은 뜻하지 않게 찾아오고 또한 우리를 결박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저 작은 아이는 버스 크기만 한, 버스 엔진 소리만큼의 슬픔을 일찍부터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배우지 않아도 되는, 자라나면 언젠가 느낄 법한 슬픔이 저 아이의 파란 킥보드를 까맣게 덧칠하고 만 것이었다.
그래, 삶은 이유도 없는 슬픔으로 덧대어진다. 슬픔의 원인을 아이에게 아무리 따뜻하게 설명하려 한들, 아이는 이미 슬픔을 가득 안았을 테니까. 어떤 변명과 이해가 아이의 슬픔을 덜어줄 수 있으랴. 무책임하게 커버린 어른의 몸집을 탓할 수밖에.
어떤 날은 유난히도 슬픈 색이 내 삶의 영향권을 독차지할 때가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어른. 저 두껍고 기다란 버스를 향해 손가락질도 할 수 없으며, 뛰어가서 기사의 멱살을 잡을 수도 없는, 더군다나 아이의 슬픔에 공명할 수 없는 그저 훌쩍 키만 커버린 어른에 불과하다. 내 몸은 크게 보이겠지만 여전히 마음은 아이에 머문, 왜소하고 부끄러운 어른일지도 모른다. 유난히 하늘이 푸르른 날,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할 거라 생각했던 저녁은 이유도 없이 낮게 깔렸다. 나는 몸을 구겨버리거나 더 작게 만들고 싶었다.
작은 아이는 부디 오늘의 슬픔을 잊었으면 좋겠다. 슬픔이 그 아이의 전반적인 것들을 지배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나대로 그 아이는 그 아이대로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언젠가 어디서 마주치더라도 그때는 세상을 슬프게 해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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