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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정이 Apr 03. 2020

하마터면 바리스타가 될 뻔했다

커피 장인분들께 사과드립니다

"정이정이님, 퇴근하고 바리스타 자격증 같이 공부하실래요? 이제 저희도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고요"

"오? 그럴까요? 좋아요!"

"정말요? 여기 회사 건물 옆에 모퉁이를 돌면 바리스타 자격증 학원이 있어요 거기로 같이 가요"

"아! 맞다! 근데 저 생각해보니 제가 커피를 못 마시네요... 하하하..."

"이럴 수가... 근데 커피 못 마시는 분들도 자격증 따러 오시기도 하세요, 근데 커피 만들고 맛도 봐야 하고 서빙도 해야 하고 실기에 그런 것들이 있데요"

“그럼 저는 좀 더 고민해볼게요!”


벌써 몇 해 전 같은 회사를 다니던 직장 동료와 나눴던 짤막만 대화가 떠올랐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긴 했지만 늘 미래가 불안한 상황 속에서 제2의 인생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며 고민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대화처럼 정작 커피를 마시지도 못하면서 불쑥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겠다니, 그렇게 시도도 하지 못했던 자격증 도전은 끝이 났고 같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자고 제안했던 동료는 그 이후 자격증을 따고도 열심히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정이정이님, 뭐 드실래요?"

"음... 커피 말고 아무거나 괜찮아요... 녹차라떼?"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이랑 녹자라떼 한잔 주세요, 근데 정이정이님 왜 커피 안 마셔요?"

"아... 커피를 마시면 잠이 잘 안 와서요, 그래서 커피 잘 안 마셔요"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해왔다고 생각하지만 같이 카페를 가거나 음료를 주문한 적이 없던 동료와 카페에서 주문을 할 때면 늘 등장하는 대화 패턴이었다. 녹차라떼나 망고주스, 때에 따라서 허브티 등 주문하는 음료는 달라지긴 했지만 커피를 먹지 않으니 카페에서 주문할 수 있는 음료는 항상 '커피 말고 아무거나'라는 전제가 붙어있었다. 물론 그렇게 주문을 마치고 나면 늘 돌아오는 것은 왜 커피를 안 마시냐는 물음이었고 거기에 대한 대답도 늘 비슷하게 정해져 있었다.


커피를 잘 안 마신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지만 가끔 커피 종류를 빼면 영 고를 수 있는 음료가 제한된 곳도 있었으니 난감하기도 했고, 아메리카노의 압도적인 저렴한 가격과는 다르게 특별행사 한번 하지 않는 다른 음료들의 가격은 단체로 주문하는 시점에선 눈총을 받기 딱 좋은 선택지였다. 가끔 어디 가서 커피 한잔이라도 얻어먹게 되는 날이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으니, 커피잔을 건네는 성의가 그렇게 달갑지만은 않았다.


수많은 카페 속에서 팔려나가는 수많은 커피들 사이에서 오늘도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다른 메뉴를 고르고 있고 또 각자의 취향에 따라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순댓국집에 가서 순댓국이 아니라 만둣국을 시키더라도 '왜 순댓국 안 먹어요?'라는 물음을 하지 않는 것처럼 카페에서 커피를 안 시키더라도 '왜 커피 안 마셔요?'라는 물음이 나오지 않기를, 이제는 그 어떤 주문에도 자연스러워지길 바라본다.


그나저나 커피도 못 마시는데 바리스타에 도전하려고 했다니...

커피는 안 마시지만 커피 장인분들께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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