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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Nov 12. 2020

베트남에 대한 오만과 편견

여러분은 ‘베트남 사람’하면 어떤 인상이 떠오르는가? 일반적인 인상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왜소한 체격, 까무잡잡한 피부, 알 수 없는 경박한 발음으로 떠들어대는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 “베트남 신부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베트남 처녀 싸게 사세요.” 같은 국제결혼 중개업소의 선전 문구를 떠올리게 하는 베트남 결혼이주 여성들. 그리고 농라(베트남 삿갓)를 쓰고 메뚜기 떼처럼 정글 속에서 튀어나오는 월남전 기록 영상물 속 베트콩들. 

한국인이 베트남인을 대하는 태도는 가혹하다. 걸핏하면 무시하고 거만하게 군다. 언제부터 우리 국민이 이렇게 야비하고 비열해졌는지 모르겠다.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 사람들은 모두 미개하고 열등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재일교포인 서승 리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구미 숭상, 아시아 멸시’가 일본의 정신구조라고 했는데, 나는 그것이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베트남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지은 원죄가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는 베트남전 파병 국가였다. 우리나라는 양민 학살과 ‘라이따이한(한국인 남성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매춘과 강간에 의해 태어난 경우가 많았다.)’을 양산, 베트남인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전쟁세대들은 지금도 자신들이 겪은 어느 제국주의 군대보다 한국군을 가장 악랄한 군대로 기억할 정도다.  

젊은이들은 이미 오래전 일이므로, 베트남 참전이 지금의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 논리라면 우리도 일본에게 식민지 시절의 만행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일본에게는 집요하게 도덕적 책임을 물으면서, 우리가 행한 폭력에 대해서는 쉽게 면죄부를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자기기만이다. 혹자는 미국의 용병으로서 파병되었으므로 가해자라기보다 피해자에 가깝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살인이 무죄가 아니듯, 용병으로서 행한 범죄라고 해서 무죄가 될 수는 없다.

작년 5월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도 나빴다. 전쟁터의 성 문제로 여성을 이용했던 것은 틀림없다”고 전제하면서도 “그러나 한국군도 베트남전에서 성 문제로 여성을 이용하지 않았나?” 하고 반문했다. 이것은 일종의 ‘물 타기’로 망언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극우인사들이 이런 발언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베트남 참전이 우리의 도덕적 아킬레스건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참전은 과거만의 문제도 아니고, 참전 병사에 국한된 문제도 아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경제규모 15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 참전 때문이다. 파병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경제군사원조를 얻어냈고, 그것이 고도성장의 결정적 토대가 되었다. 결국 우리는 베트남 사람들의 피가 묻은 돈으로 잘 살게 되었고, 그 풍요를 모두가 누리고 있다. 우리의 경제 기적은 한강이 아니라 피로 물든 베트남 쏭바강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우리의 경제적 풍요는 결코 자랑스러운 것이 못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베트남인들은 결코 무시당할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만큼 위대한 민족도 없기 때문이다. 베트남인은 프랑스, 일본, 중국,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결국 자신들의 존엄과 독립을 지켜냈다. 제국주의 시대, 우리 조선을 포함해 많은 식민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강대국의 침략에 맞서, 이렇게 위대한 인내와 정신의 저력을 보여준 민족은 전 세계에서 베트남이 유일하다. 우리는 일제 하나 자력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타의에 의해 “도둑처럼 온 해방”을 맞지 않았는가?

우리는 같은 아시아인이고, 똑같이 피식민 지배 경험을 가진 민족으로서 오히려 제국주의의 등에 업혀 베트남을 무참히 짓밟았다. 올해가 베트남 참전 50주년이다. 정부에서는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라 한다. 진지한 반성과 위로는 못할망정 ‘기념행사’라니. 말이 안 된다. 우리는 베트남전의 의미를 진지하게 자문하고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도덕적 성숙과 그릇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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