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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Nov 27. 2020

타자에게 절망을 위임하는 사회

영화 〈밀양〉에 나타난 사회적 병리 현상

정호승의 시 중에 〈슬픔이 기쁨에게〉(1978)가 있다. ‘겨울 밤 거리에서 귤 파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고,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凍死者)가 다시 얼어 죽을 때 무관심한 너에게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고 노래하는 이 시는 암울한 독재 시절 쓰여졌지만, 공동체 사회를 위해 따뜻한 ‘슬픔의 위임’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독재치하에서 벗어난 오늘날은 어떤가? 생존을 위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사람들은 타인의 슬픔에 무관심하고, 나아가 자신의 절망을 타자에게 떠맡기기에 급급하게 되었다. 

이청준의 소설 「벌레이야기」를 각색한 이창동의 〈밀양〉은 그런 ‘절망의 위임’이 어떻게 연쇄적인 불행을 낳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주인공은 피아노 학원 강사 이신애(전도연 분). 그녀의 꿈은 원래 피아니스트였지만, 남편과 일찍 결혼하면서 꿈이 무산되었다. 결혼생활도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남편은 바람을 피웠고, 사업에 실패했으며,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남은 것은 깊은 절망과 어린 아들 뿐. 그녀는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이사와, 조그만 피아노 학원을 열고 새 삶을 시작한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부유한 미망인인 것처럼 허세를 부린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빚에 쫓기던 아들의 웅변학원 원장이 아들을 유괴한 것이다. 그녀는 돈이 없다며 유괴범에게 애걸했지만, 아들은 살해당하고 만다. 아들마저 잃은 그녀는 신에게 의지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그녀는 감옥에서 고통 받고 있을 유괴범을 신의 이름으로 용서하고자 한다. 그러나 수감 생활 중 전도된 유괴범은 이미 하나님에게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노라 말한다. 유괴범은 자신이 줄곧 그녀를 위해 기도해왔으며, 그녀가 하나님을 통해 평화를 얻은 것을 보니,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준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에 따르면 오히려 유괴범이 그녀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해준 꼴이다.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입은 그녀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불륜, 도벽, 자해를 저지르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세상에는 하나님도, 정의도 없다고 믿게 된 그녀.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그녀는 미용실에서 일하는 유괴범의 딸을 만난다. (그녀는 유괴범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불량청소년들에게 폭행당하는 그 소녀를 방관한 적이 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딸은 학교를 때려치웠으며 사고를 쳐서 소년원까지 갔다 왔다. 미용기술도 소년원에서 배웠다. 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의 머리를 다듬고, 그녀는 견딜 수 없다는 듯 미용실을 뛰쳐나온다. 

이신애의 허세는 젊고 가난한 싱글맘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허세는 아들의 죽음을 낳았다. 유괴범은 신에게 구원받아 죄로 인한 고통을 덜 수 있었다. 그러나 고통과 불행은 소멸되지 않았다. 유괴범이 벗어던진 고통과 불행은 고스란히 그 딸이 짊어졌다. 영화는 당구대 안의 당구공처럼 이리 저리 밀려다니며 발생하는 연쇄적 불행을 보여준다. 

의학자들에 따르면 암과 같은 치명적인 육체적 질병에 걸린 사람은 정신질환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절망에 빠진 사람의 메커니즘이 육체적 질병과 정신적 질병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당한 사회적 체계는 사회적 스트레스를 발생시키고,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그 스트레스의 영향을 받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타자에게 그 스트레스를 전가시킨다. 사회적 범죄나 생태계 파괴 역시 스트레스를 타자에게 전가시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은 심플하다.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타자에게 스트레스를 전가시키는 대신, 사회적 스트레스의 양을 증폭시키는 부당한 사회적 체계를 고쳐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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