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의 영광과 오욕

by 글맛공방

스트레스와 욕의 변증법

욕의 본질은 공격성이다. 욕은 모욕하고 저주하는 말을 퍼부음으로써 상대방을 공격한다. 그러나 욕은 반드시 명확한 상대가 있어야만 튀어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이를 테면 “이 개 같은 세상!”이라고 욕하는 것이 그렇다. 명확한 상대를 발견하지 못할 때, 욕의 대상은 익명의 ‘그놈들’이 된다.

욕은 충동적으로 터져 나온다. 그것은 쉽게 억눌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이성과 경험, 자기 통제능력이 부족한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에이씨, 짱나!”라는 말―이 말은 요즘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을 들은 교사나 부모는 “너, 어른 앞에서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하고 다그치게 된다. 그러면 아이들은 “선생님(엄마)한테 그런 거 아닌데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변명만은 아니다. 실제로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온 경우가 많다.

욕은 예삿말로 다스리지 못하는 충동이고 일탈이다. 그것은 벼랑에 내몰린 사람이 내뿜는 ‘막말’이다. 문란한 기운이고 반란의 징후이다. 분명한 것은 욕이 과도한 스트레스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집단에서 욕이 횡횡한다면 그들의 사회적 상황과 인간관계가 나쁘다는 증거이다. 청소년들의 욕은 과도한 입시경쟁으로 인한 울분과 좌절, 고통과 불안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청소년들의 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겪고 있는 스트레스를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욕은 감정의 발산이면서 동시에 ‘삭이는’ 것이다. 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혼자서라도 욕을 하면 마음의 위안을 받고, 긴장을 완화된다. 면전에서 어떤 사람에게 욕을 하면 싸움이 되어 감정이 더욱 격해지지만, 혼자서 하는 욕은 그렇지도 않다. 면전에 대고 욕하는 것처럼 후련한 맛은 없지만, 대신 싸움이 나지도 않으면서도 마음은 달래진다. 그럴 때 욕은 순기능을 하기도 한다.


욕설의 해방 기능

욕설에는 자기해방의 기능이 있다. 자기해방의 기능은 사회적으로 신성시, 금기시되는 대상을 욕보일수록 더욱 커진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춘성(春成) 스님이다. 열세살에 출가해 당대 최고의 선지식(善知識)인 만해, 용성, 만공의 가르침을 받았던 춘성은 『화엄경』을 거꾸로 외울 정도로 해박했다. 그런 춘성은 욕으로도 유명했다. 그가 어느 날 산림법 위반으로 경찰서에 잡혀갔다. 경찰이 주소를 물었다. 춘성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우리 엄마 XX다.” “본적은?” “우리 아버지 XX다.”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불경스런 대답이다. 걸인을 만나면 입은 옷을 훌훌 벗어주고 팬티바람으로 절까지 걸어오곤 했던 춘성. 잘 때는 이불도 덮지 않고 잤던 그는 ‘걸망에 죽비 하나, 빼놓은 틀니 하나, 주민등록증, 그리고 빤스 하나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욕설은 기행과 더불어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처럼’ 구애됨 없는 선승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도올 김용옥이 “춘성의 욕은 『벽암록』을 뛰어넘는 공안”이라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김삿갓의 일화에도 이런 것이 있다. 황해도를 돌아다니던 그는 추운 겨울날 하룻밤 묵어갈까 해서 어느 서당에 들렀다. 그러나 훈장은 나와 볼 생각도 않고 꼬마들 몇 놈만이 문밖을 내다보며 낄낄거렸다. 길손을 깔보는 것이 분명했다. 그에 김삿갓은 이런 시를 지어 읊었다. “書堂乃早知(서당내조지) / 房中皆尊物(방중개존물) / 生徒諸未十(생도제미십) / 先生來不謁(선생내불알).” 뜻은 이렇다. “서당을 일찍 알고 와보니, 방안에는 모두 귀한 분들일세. 생도는 열 명도 안 되고 선생은 와서 얼굴도 내밀지 않네.” 평범한 내용이다. 그러나 한문을 음독해보면 그것이 곧 욕임을 알게 된다. 욕도 문학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욕은 문학적으로도 해방의 기능이 있다. 욕은 관용적 표현과 규칙을 과감히 뛰어넘는다. 욕은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을 절묘하게 조합시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제 아비 메치고 힘 자랑할 놈” “접시 물에 빠져 죽을 놈” 같은 표현이 그렇다. “손주 제삿밥 받아먹을 때까지 살아라, 이 썩을 놈아” “육시랄, 모가지를 빼서 똥 장군 마개로 박을 놈아” 같은 표현은 또 어떤가. 그 기발한 상상력에 파안대소하지 않을 수 없다.


대중문화의 욕과 청소년

세종은 우리 역사 최고의 성군이다. 그런 왕이 평소 욕을 한다면?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그랬다. 드라마 속에서 세종(한석규 분)은 하례를 준비해야 한다는 궁녀들의 말에 “어이구, 지랄. 뭔 놈의 왕은 그렇게 의례가 많아.”라고 한다. 놀란 궁녀가 “듣는 귀가 많습니다. 부디 언사를…….”이라고 하면, 또 “젠장, 우라질”이라면서 욕을 내뱉는 식이다. 그럴 때, 시청자들은 묘한 쾌감을 얻는다. 박제화된 역사적 인물이 따뜻한 피가 도는, 사람냄새 나는 인물로 변하는 느낌이랄까?

지금도 욕쟁이 캐릭터는 여전히 인기이다. 시트콤 ‘감자별’에서 대기업 회장의 아버지로 욕쟁이 할아버지 캐릭터인 노송(이순재 분), 드라마 ‘미래의 선택’의 욕쟁이 아나운서 김신(이동건 분), 최근 개봉된 영화 ‘롤러코스터’의 욕쟁이 한류스타 마준규(정경호 분)가 그렇다. 이런 캐릭터들의 공통점은 대외적으로 위신이 매우 높은 인물들로, 점잖은 체 해야 하는 위치나 직업을 가진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그런 사람들이 제 성격을 참지 못하고 욕을 내뱉을 때, 체신이 일시에 붕괴됨으로써 웃음을 유발한다.

예로부터 소리꾼이나 광대 같은 연희예술가들은 능숙한 말솜씨로 관중이 욕하고 싶은 것을 대신해주며 인기를 끌었다. 이를 테면 흥부전, 춘향전, 허생전, 이춘풍전에서 등장하는 욕설은 그저 그런 상소리가 아니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욕들은 혀에 착착 감기면서도 특정 대상이나 특정 상황의 모순을 적확하게 표현했다. 특히 부패한 양반이나 관료를 평민과 같은 위치로 대뜸 끌어내려 동류화한 다음 속 시원하게 조롱하고 능멸할 때의 욕은 십년 묵은 체증을 내려가게 할 정도로 통쾌한 맛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풍자와 해학이었다. 욕은 풍자와 해학의 주된 수단이었다.

요즈음 대중문화에서도 욕이 이런 격조가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힙합 디스전에서 개코는 ‘I can control you’라는 곡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할 줄 아는 게 투정뿐인 무뇌야……그냥 집에서 X뺑이 까라.” 또한 사이먼 디는 “이 X발놈아.……돼지새끼 여전히 불판 위에서 아직 덜 익었네. 넌 raw한 것도 rare한 것도 아닌 그냥 웩.”이라고 노래했다. 랩은 본래 소외된 흑인들의 사회 비판의식이 깔려 있어 거친 가사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비판적인 것도 아니다. 그냥 개인적인 인신공격성 욕설일 뿐이다.

예술은 사회적 행위이다. 사회적 함의와 사회적 기능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욕이 등장한다면 정교하게 가공된 것이어야지, 날 것 그대로의 욕이 등장해서는 안 된다. 대중문화에서의 욕과 십대들의 욕은 상호 되먹임 관계에 있다. 문화상품들은 현실을 반영한다며 욕을 대량으로 보여주고, 그 영향을 받은 십대들은 욕이 더 는다. 대중문화는 현실의 반영만이 아니다. 대중문화는 현실을 주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기 고유한 역할을 방기한 채, 자극적인 욕만 남발하는 것은 저급한 상업주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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