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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끄적거림

일년에 하루 뿐인 날

by 지안


1910년 8월 29일. 조선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겼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숨죽이며 살아야 했고, 강제 동원과 수탈, 민족말살정책 속에서 점점 더 고통받았다. 그러나 조선의 백성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불씨는 식지 않았고, 곳곳에서 더 타오르고 있었다. 특히 1919년 1월,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본의 황제 메이지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고종 황제마저 갑작스럽게 서거하자, 백성들은 이에 대한 의혹과 분노로 들끓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 도쿄에서 유학 중이던 조선인 학생들은 조국의 독립을 외치며 '2·8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 YMCA회관에서 열린 이 선언은 학생들이 주도한 독립운동의 신호탄이었다. "조선 청년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라는 외침은 일본 경찰의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이 선언은 국내로 빠르게 전해졌고, 삼일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본래 거사의 날짜는 3월 3일, 고종 황제의 장례식 날이었다. 그러나 장례식과 함께 만세운동을 펼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하루 앞당겨 3월 2일로 정했지만, 이날은 일요일로 기독교인들의 예배가 있는 날이었다. 결국 3월 1일이 선택되었고, 이로써 우리 역사에 남을 ‘삼일절’이 탄생했다.


그날,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 선언문이 전해지는 순간, 탑골공원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대한 독립 만세가 울려 퍼졌다. 학생들은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나섰고, 장사꾼들은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농민들은 논밭을 떠나 만세 행렬에 합류했다. 조선의 백성들은 더 이상 신민(臣民)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주적인 시민(市民)이자 독립된 나라의 국민이었다.


그러나 독립의 외침은 곧 탄압으로 돌아왔다. 일본군과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고, 곤봉을 휘둘렀다. 특히 서대문형무소, 그곳은 자유를 꿈꿨던 이들에게 지옥이었다.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고문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가장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그들은 결코 독립에 대한 염원을 놓지 않았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윤희순이다. 그녀는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남성들만이 싸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윤희순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의병을 조직하고, 직접 군자금을 모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여성들을 모아 '대한독립여자군'을 결성하고, 전투뿐만 아니라 의병을 위한 노래를 짓고 글을 남겼다. 그녀는 단순한 후방 지원자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선봉에 선 투사였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무력 투쟁뿐만 아니라 문학으로 독립의 불씨를 지핀 이도 있었다. 바로 이육사. 그는 17번이나 투옥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의 본명은 이원록. 어린 시절부터 민족의 아픔을 가슴에 품었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일본의 감시를 피해 항일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는 총과 칼이 아닌, 글로써 조국의 독립을 꿈꾸었다. 그의 시는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을 노래했다. 대표적인 작품인 「청포도」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그는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하고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결정된 데에 삼일운동은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탄생했다. 왕국과 제국의 시대를 지나 민국(民國)으로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조선의 백성은 시민이 되었고, 시민은 민주주의를 향한 걸음을 내디뎠다.


우리가 삼일절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 날을 단순히 쉬는 날로만 기억할 수 없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는 지금의 자유와 권리는 그들이 흘린 피와 눈물, 독립을 향한 처절한 염원 위에 서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당장 내 삶, 현생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버겁지만. 일 년에 단 하루뿐인 삼일절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다시 한번 자문해야 한다. 기필코 식민지 시대를 대물림 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나라를 지키려 했던 이들의 희생 앞에서 현재의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일까? 지금 우리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 후손들에게 결코 대물림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마음속에 새기며,

삼일절을 보낸다.


그리고 최태성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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