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어느 순간부터 나는 길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지나온 자국이 분명한 길을 따라 걸었고, 예측 가능한 풍경 속에서 안도했다. 이름이 알려진 곳을 여행하고, 검증된 문장을 읽고, 많은 이들이 머물다 간 감정 위에 조심스럽게 내 마음을 얹었다. 길을 잃을 틈도, 헤맬 겨를도 없이.
그런데 가끔은 생각한다.
내가 찾은 풍경들이 정말 내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남들이 아름답다고 말한 장면들 사이에서 적당한 감탄을 흉내 내며 서 있었던 것뿐일까?
언젠가, 우연히 길을 잘못 들었던 적이 있다.
가는 길이 분명했지만, 순간적으로 걸음을 헛디뎠고, 나는 낯선 골목에 서 있었다.
골목은 오래된 시간을 품고 있었다.
창문마다 다른 모양의 커튼이 걸려 있었고,
일관성이라고는 빛바랜 모습뿐인 간판들이
제각각 걸려 있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어딘가에서 종이 울리는 듯한,
맑고도 아련한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낮게 걸린 전깃줄에는 새들이 앉아,
날아오를 듯 말 듯 미세한 떨림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골목을 걸었다.
목적지도, 누구의 추천도 없이,
무엇엔가 홀린 사람처럼.
좁은 골목을 따라가자 낡은 책방 하나가 나타났다.
오래된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창가에는 작은 화분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주인은 오가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가는 이도 거의 없어 보였다.
책장 사이에 낡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햇살이 내려앉아 조용히 머물고 있었다.
나는 책 한 권을 골랐다.
남들이 위대한 문학이라 부르는 책도,
감동적인 명대사가 있는 책도 아니었다.
단지 그날의 무엇이 내 손을 이끌었을 뿐이다.
한 장 한 장 스쳐보며 책장 넘겼는데,
몇 장이 한꺼번에 확 넘겨지더니
어느 한 페이지에서 딱 멈췄다.
그 사이에 찢어진 작은 종이 한장이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적힌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우연은 운명이 길을 잃은 순간.”
나는 그 문장을 한동안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길을 잃지 않으려 애쓸수록,
정작 내 것이 될 장면들을 놓쳐버린 건 아닐까?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길을 걸으며,
정작 나만의 길을 잃고 있던 건 아닐까?
그 순간 깨달았다.
예정된 길에서 벗어난 걸음들이,
실수가 아니라 나를 향한 또 다른 길이었음을.
때로는 길을 잃어야만,
길이 아닌 곳에서도 의미를 발견해야만,
비로소 나만의 풍경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길을 잘 찾아야 해.”
“실수하면 돌아가기 어려워.”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들은
늘 길을 잃었을 때 찾아왔다는 걸.
예정되지 않은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발견했다.
누구도 추천해 주지 않은 골목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책장에서,
그리고 그 모든 우연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다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무심하게 길을 잃고 싶다.
우연히 만난 바람을 따라가고, 낯선 거리를 서성이고,
예상치 못한 문장 속에 마음을 빼앗겨도 좋겠다.
길을 잃을 때마다, 나는 나의 풍경을 찾아갈 테니까.
길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잃는 것'일까.
또 하나의 길을 얻는 것 아닐까?
길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잃는 일’일까?
아니면, 세상 어디에도 없던 나만의 길을 얻는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