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요가를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에필로그

by 지안

어떤 목표로 요가를 시작하려 하시나요? 또는 어떤 이유로 요가를 시작하려 하시나요?라고 물어보면 꽤나 많은 사람이 유연성을 기르고 싶어서, 건강을 위해, 체력을 기르기 위해 시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요가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도 연결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나는 이효리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요가를 시작했다. 다른 조건과 여건은 모두 뒤로하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짊어지게 된 삶의 무게를 요가를 통해 내려놓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삶을 바라보고,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과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나도 요가를 한다면 정말 저렇게 평온한 마음가짐으로 삶을 대할 수 있게 될까? 나를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싶은 질문을 품고 요가를 시작했다. 요가를 통해 꼭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아닌, 그런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순례길을 걷기로 결심한 때도 마찬가지였다. 순례길을 통해 뭔가를 얻겠다는 부동의 목적보다 도대체 순례길이 어떻길래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일까?라는 궁금증에서 시작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요가를 통해 구체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하는 마음으로 하기보다, 매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사랑하고, 그러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일상으로 가득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요가와 순례길이 나에게 가르쳐준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설명해 봐!라고 물어본다면 ‘인생에 정답은 없으니 그저 매 순간 나답게 살면 될 뿐이다.’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나답게 살려면 무엇이 중요한데?’라고 질문을 한다면,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무엇이고, 그것들이 정말 나의 것인지, 나인지에 대한 질문을 냉정하고 섬세히 하면서 내가 아닌 것들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을 모조리 털어내는 연습을 해보라고 말하고 싶다.(예를 들어 고가의 물건들, 값비싼 추억들) 그러면 굳이 ‘나’를 찾지 않아도 된다는 답을 얻게 된다. 내가 될 수 없는, 내가 아닌 수많은 다른 것들로 나를 재구성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을 하나하나씩 던져버리게 되면 ‘나’는 나 자신 안에 늘 같은 모습으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찾아지지도,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나’로써 늘 ‘존재’ 해 왔고, 존재해 있다는 것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요가를 이제 막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은 사람이 있다면, 어떠한 구체적인 목표나 이유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밖에서 이유를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가를 하는 그 순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정리해 보면, 요가는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나를 둘러싼 것들이 무엇이고, 그것들이 정말 나의 본질과 연결되는 것인지, 혹은 단순히 사회적 역할이나 기대에 의해 덧씌워진 것인지 묻는 것이다. 요가를 하면서 내 안의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다 보면, 더 이상 '나'를 찾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본래부터 존재해 왔고, 단지 다른 것들로 덮여 있을 뿐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요가는 그렇게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나 아닌 것들을 덜어내는 과정이 되어주는 것이다.


난 요가를 하는 순간이 가장 나다운 순간이라는 확신이 생겼고, 매트 밖의 일상에서도 나의 삶을 존중하고, 하루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며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그냥 나에게 주어진 오늘에 감사하며 최선의 하루를 살고 있다. 그걸로도 충분하다.




요가에 대한 몇 가지 오해


요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오해 중 하나는 ‘나는 몸이 뻣뻣해서 요가를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요가는 유연성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유연하면 좋겠지만, 유연하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다. 요가를 가르치는 입장인 나도 상당히 뻣뻣하다. 못하는 동작들도 많다. 중요한 건 몸을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내가 지금 내 몸을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이다. 요가를 하며 매 순간 호흡을 깊게 하고 알아차리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가를 하는 와중에도 또다시 내가 생각에 이끌여가고 있지는 않은지, 불편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저항하는 마음만 쓰고 있는지 알아차리기 위해서다.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고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그러한 생각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당장 내 몸이 엉망이고, 잘하지도 못할 것 같다는 이유로 망설인다면 전혀 개의치 않아도 된다. 아사나(요가 동작)는 요가의 한 형태일 뿐이고, 수단일 뿐이다. 완성된 자세가 요가의 목적은 결코 아니다. 처음엔 당연히 어려울 수 있다. 요가는 단순이 몸만 움직이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매 순간 마음을 의식적으로 쓰면서 행해야 하는 철학적인 요구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몸이 자연스럽게 열리듯, 마음도 열리게 된다.


또 하나의 오해는 요가를 하면 무조건 평온한 사람이 된다는 생각이다. 사실 요가를 하다 보면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이 올라올 수도 있다. 내 몸을 들여다보면서 억눌렸던 감정들이 떠오를 수도 있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불안과 마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치유의 과정이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요가를 하는 사람은 모두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늘 평온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운동선수도 컨디션이 좋을 때가 있고, 좋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꾸준히 운동을 해서 최대한 늘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같이 운동을 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디서 들은 말인데,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배우자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관객이 안다는 말이 있다. 정말 맞는 소리다. 요가를 수련하는 사람, 선생님들도 그래서 꾸준히 수련하고, 수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깨달음은 단 한순간에 벼락같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단 한순간에 쏜살샅이 달아나기도 한다.




요가를 대하는 마음가짐


요가를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는 것이다. 요가는 경쟁이 아니다. 특정한 동작을 완벽하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더 깊은 자세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오늘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어떤 날은 몸이 가볍게 움직여서 수련이 즐겁고, 어떤 날은 몸이 무거워서 힘이 들 수도 있다.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은 가장 최악이다. 비교 평가가 인생을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거라 생각한다. 중요한 건, 그런 부질없는 생각, 망상들로 나를 가치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주어진 수련을 오늘도 할 뿐이다.


이제 이 말이 안 나오면 허전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매트 위에서의 경험은 우리의 일상과도 연결된다. 매트 위에서 오늘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점차 일상에서도 나를 더 이해하고 존중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내가 나를 받아들이듯,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요가가 우리 삶에 가져다주는 가장 큰 변화일지도 모른다.




매 순간을 살아가는 연습


요가는 나에게 가장 '나다운 순간'을 선물해 줬다. 매트 위에서 호흡하고, 움직이며,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경험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상에서도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매 순간은 아니지만 꽤 많은 순간들을 그렇게 살고 있다.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불안해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연습을 통해 얻게 된 평온인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 전에도 말했듯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삶이 충분히 의미 있었고, 앞으로도 후회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나는 부족해, 부족한 인간이야. 더 채워야 해. 그래야 인정받고, 잘 살 수 있어. 더 좋은 경험을 해야 행복해. 그동안 고생했으니 그것만큼, 아니 더 큰 보상을 받아야만 해. 남이 그런 보상을 주지 않으면 내가 소비를 통해 보상을 주어야 해.라는 생각을 하며 산다. 이런 생각은 절대 내가 못나서 하는 생각이 아니다. 사회가 심어놓은 무의식의 번뇌이다. 특히 sns의 발달과 보급으로 세상과 사람 간의 접촉이 불필요할 정도로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나와는 전혀 상관도 없고, 의미도 없는 사람들의 삶을 보아야 한다. 인간은 무언가를 보면 바로 나에게 적용해 보는 습성이 있다. 그리고 나와 비교해서 나보다 더 좋다고 판단하면 그걸 따라 하려는 습성을 보인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쌓이면 난 오히려 불행해질 뿐이다. 비교 언제나 날 낮추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나의 삶을 살 수 없고, 남의 좋은 것을 따라다니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나를 잃는 것이다. 그럴 때 중요한 건 역시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가 또다시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을 쫓는구나. 하고 의식하면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습관적으로, 관성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멈출 수 있다. 그런 순간들이 늘어가면 내가 아닌 것들을 덜어낼 수 있고, 나 다움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나를 다른 무엇인가로 채우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느낌이 살아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지금 여기 온전히 존재할 수 있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많은 것들에 감사하게 된다. 충만해진다. 그렇게 매 순간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앞으로도 요가를 계속하고 싶다.’ 사실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도 싶은데 이렇게 말하는 건 또 다른 집착을 만들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오늘도 요가를 했다.”이다.


이 말의 의미를 느꼈다면 이미 요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요가는 나를 가장 '나다울'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고, 매 순간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이런 소리를 종종 듣는다.


‘축구나 인생이나 똑같아요.’

‘등산이나 인생이나 똑같아요.’


요가도 마찬가지다.


매트 위에서 그리고 매트 밖의 삶이 있다.

이 둘은 똑같다.

나는 오늘도 매트 위에서 오늘의 요가를 했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살았다.

그뿐이다.

그냥 현재를 사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전부다.

요가가 나에게 가르쳐 준 가장 큰 가르침이다.


keyword
이전 15화요가를 통한 치유와 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