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을 수 있었다.
매트 위에서 수련하며 나의 숨에 집중하고, 감각을 바라보는 연습을 계속하다 보니, 어느새 지금 이 순간의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법을 요가는 천천히, 그러나 깊게 가르쳐주었다. 물론 언제나 그런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건 아니다. 어느 날은 습관처럼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문득 과거를 떠올리며 후회하거나,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순간마다, 나는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방법을 배웠다. 지금의 나에게 집중하고, 내 호흡에 헌신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깨달음은 단 한순간에 찾아올 수도 있지만, 그만큼 단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수련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그 말은 요가가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뇌와 마음의 패턴은 단지 한 세대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천, 수만 년에 걸쳐 축적된 깊은 습관과 무의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나다운 나’로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존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만이 무의식적인 습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조차 모호하게 느껴질 때 두 눈을 감고, 코끝을 드나드는 숨결에 집중해 보자. 생각이 떠오르면 붙들지 말고, 그저 흘려보내자. 그 생각들조차도 내가 아니다. 잠시 왔다가 사라질 ‘무언가’ 일뿐이다.
그리고 다시, 호흡에 집중하자.
그 고요 속에서 어느새,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나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수용의 마음이 생겼다.
예전엔 알면서도 잘 안 됐다.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맞지 않는 사람을 자꾸 멀리하게 됐고, 특히 직장 생활을 하며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 불신, 무관심이 커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짓는 습관이 생겼다. ‘좋은 사람’, ‘안 좋은 사람’ 단 두 가지로 나눠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요가를 하며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다 보니,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어떤 감정이 올라오더라도, 그 자리에서 바로 멈출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 하나만으로 판단하고, 순간의 인상으로 사람을 정리해 버리는 게 얼마나 부질없고, 또 얼마나 오만한 태도였는지를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누군가가 나에게 불쾌한 언행을 하면 그 순간은 마음이 불편해지고, 감정이 올라온다.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곧 가라앉고, 나는 조용히 이렇게 말한다.
‘그럴 수도 있지.’
만약 나와 정말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젠 굳이 그 사람을 좋은지 나쁜지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은 그냥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 가만히 돌아보니, 내가 타인을 그렇게 판단하고 괴로워했던 건 어쩌면 나 자신에게도 비슷한 잣대를 들이대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평가하고 괴롭혀 왔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니 결국, 먼저 나를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만, 타인도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다는 걸 요가가 가르쳐주었다.
매트 위에서 혼자 수련하며 얻은 내적인 깨달음도 컸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함께했던 두 선생님과 도반들 덕분이다. 그들이 나눠준 따뜻한 시선, 그들의 호흡, 손길, 말투… 이 모든 것들이 내 마음을 깊이 어루만져주었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다시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떠올릴 수 있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를 다시 믿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요가를 가르치게 되면서, 나는 또 다른 배움을 시작했다. 수련자일 때와는 전혀 다른 깊이의 수련이, 가르침 속에서 나를 더 단단하게 성장시켜주고 있다. 함께 호흡을 맞추고, 흐름을 나누는 시간 속에서 ‘나와 타인’ 사이의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허물어짐이, 오히려 나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일상이 풍요로워졌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내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요가를 통해 이 문장이 조금씩 실감 나기 시작했다. 수련을 하며 나에게 집중하는 법을 배우고, 그 마음가짐을 일상으로 옮겨오다 보니, 이전에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풍요로움의 결이 서서히 드러났다. 무언가를 가져야만 행복할 것 같고, 누군가의 마음을 얻어야만 온전해질 것 같고, 어떤 성취를 이루어야만 완전해질 것 같던 마음들. 요가는 그런 생각들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나를, 물질이나 타인의 시선, 어떤 성취로 정의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걸로는 나를 결코 채울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자 마음이 훨씬 더 가벼워졌다. 욕심이 줄어들었고, 행복의 조건이 단순해졌다. 이젠 아주 평범한 순간들만으로도 충분하다. 오히려 그런 순간들이 가장 나를 살게 하는 순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지금은 하나같이 감사한 일이 되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어제와 같은 몸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직장에 도착하는 것
일상을 마무리한 뒤, 요가원에 가서 매트 위에 앉을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정말로 ‘당연하지 않은’ 일이라는 걸, 요가가 내게 가르쳐줬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들이다. 건강도, 관계도, 시간도, 심지어 삶의 리듬조차도. 어느 날은 머무르고, 어느 날은 떠나는 것. 인연이 닿으면 함께하고,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것. 그 흐름 앞에서 우리는 붙잡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우리는 모두 한 번쯤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줄 알았던 것들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순간적인 것이었는지를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더 그렇다. 예전엔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일상들이, 이제는 눈부시도록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진다. 꼭 멋진 풍경 속에서 인생샷을 찍지 않아도 괜찮다. 꼭 이국적인 공간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경험하지 않아도 괜찮다.
요즘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집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책 한 권을 마주하며 조용히 글을 쓰는 그 시간이다. 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시간이, 지금의 나에겐 가장 큰 풍요다.
후회와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나는 원래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일상의 아주 사소한 순간에도 예기치 않게 과거가 떠오른다. 그땐 왜 그렇게 말했을까,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정말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습관처럼 밀려온다. 몸서리치며 민망해하고,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좋았을까 후회의 소용돌이에 빠져 나 자신을 끝없이 원망하고 괴롭히곤 했다. 한 번 그런 생각에 빠지면 며칠이고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혼자 끙끙대며 과거에 갇히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거의 그런 일이 없다. 이제는 그런 생각이 떠올라도, 쉽게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순 없지만, 매트 위에서 수련하며 가빠진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아, 또 왔구나’ 하고 바라보는 연습이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 생각들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대해 막연한 불안을 현실처럼 끌어당겨 그 두려움에 갇힐 때도 많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도 이미 벌어진 일처럼 받아들이며 그 무게에 짓눌리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건 현실이 아니라 망상이라는 것을.
요가는 말한다. 생각은 그냥 생각일 뿐이다. 감정도, 걱정도, 후회도, 모두 ‘내가 아니다’.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흐름일 뿐이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은 불쑥 떠오른다. 나는 어떤 성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감정들에 끌려가지 않는 법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아는 순간, 이미 마음은 훨씬 더 자유로워졌다. 그걸 ‘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나는 훨씬 안정되어 있다. 그걸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예전보다 훨씬 더 편안하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조금 격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요즘 나는 정말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건 삶이 무의미해서도,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어서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나는 충분히 살아냈고, 지금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과 평온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처음 찾아온 건 2019년, 순례길을 걸으며였다. 그 길에서 많은 것들이 무너지고, 많은 것들이 새롭게 자리 잡았다. 그때 크게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내린 답은 간단했다. “내 삶이니, 나답게 살면 그뿐이다.” 그 답을 품고 나서야, 이전의 내 삶을 돌아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 꽤 나답게 살아왔구나.”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구나.” 그동안 내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도 그제야 느껴졌다. 내가 몰랐을 뿐, 나는 꽤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기억되는 삶을 살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억만으로도, 내 삶은 이미 충분히 빛나고 충만했다.
앞으로 더 큰 행복이 찾아올 수도 있다. 물론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혹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더라도, 나는 지금까지의 삶만으로도 감사하고 만족스럽다. 요가를 하며 나 아닌 것들을 조금씩 덜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나, ‘온전한 나’를 의식하게 되면서 삶에 대한 불필요한 집착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순례길 이후의 삶은, 어쩌면 보너스처럼 느껴진다. 무언가를 쫓기보다, 지금 이 순간을 더 충실히 살아가는 삶. 그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방식이고, 그게 가능하게 된 건 요가 덕분이다. 요가는 내게 ‘가장 나다운 상태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줬다. 그리고 그런 하루를 살고 있기에, 나는 매일매일 충실하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이 말이 지금의 나를 완벽히 설명해 주는 문장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충분히 살아내고 있다. 그래서 정말,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