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절없이 가을이 떨어진다. 나뭇잎이 바람에 나부끼며 내는 파도소리가 땅으로 떨어진다. 떨어진 잎들은 사람, 새, 동물들의 발걸음을 만나 바스락거리며 조금씩 부서지고 으깨져 비닥에 짓눌린다. 모든 가을이 떨어지고, 완연한 겨울 오면 사방은 적막에 잠긴다.
가을 단풍의 낙하는 봄꽃의 낙화처럼 찬란하지만, 쓸쓸하다. 흐린 날은 특히나 더 그렇다. 단풍이 물들며 시드는 모습은 여명과 비슷하다. 천천히 진행되는 것 같지만, 정신 차려보면 순식간에 끝난다. 검푸른 하늘과 적막한 우주공간이 석양의 태양을 삼키는 것 때와 같다. 그렇게 무겁고 차가운 곳으로 사라진다.
단풍도 시간의 흐름을 성실히 따른다. 볕을 가장 잘 받는 곳부터 붉은색, 노란색, 적갈색으로 물든다. 그림자가 짙은 음지 부분이 가장 늦게 무르익고, 저문다. 날마다 달라지는 나뭇잎을 보면 자연은 정교하고 정직하다는 것들 새삼 깨닫는다.
바닥에 나뒹구는 낙엽 사이사이, 어울리지 않는 푸른 잎들이 보인다. 아직 완연히 물들지 않았는데 왜 떨어졌는지 싶다. 아마 모진 바람이나 새들의 날갯짓, 발걸음에 떨어진 것이라 짐작해본다. 지는 데 완벽한 때는 없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누구든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불운을 맞닥뜨려야만 하는 서글프고 억울한 상황에 처하기 마련이다. 개탄스럽고, 허망하고, 황망하기 그지없지만 결국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파리가 조금씩 물들기 시작하면 거의 매일 산책을 나간다. 여러 종류의 나무 이파리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물들고 떨어지기 때문이다. 일주일이면 대부분의 잎들이 옷을 갈아입고 이별할 준비를 마친다. 일 년 중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시기가 있다. 하나는 꽃망울을 터뜨리고 새싹이 돋아나는 때부터 벚꽃 잎이 휘날리는 때까지이고, 다른 하나가 요즘이다. 단풍잎이 공기 저항에 따라 살랑거리며 잔잔히 떨어지고, 은행잎은 태양이 부서지듯 흩뿌려지는 때 역시 서정적이면서 아름답지만, 온갖 종류의 나뭇잎들이 물들어 가는 과정이 더 아름답다. 초록에서 갖가지 색으로 변모해가는 모습은 경이롭다. 잎들은 죽음을 향해가지만, 동시에 새로운 삶으로 향한다. 가을의 정취는 봄보다 빠르게 지나간다. 그래서 매일 같이 산책을 나선다.
떨어진 낙엽, 바스락 거림, 이파리가 조금씩 부스러지며 풍기는 향기. 가을과 내가 만드는 귀중한 합주를 하면 행복을 느끼고, 나 역시 자연의 한 부분이구나 또다시 생각한다. 땅을 딛고 서 있는 대지의 자녀이구나 생각한다. 온몸이 가을로 가득 차고, 왠지 울적했던 기분은 이렇게 걷는 것만으로도 사라진다. 그리고 왠지 잘 살아낼 거라는 희망으로 채워진다. 단지 천천히 걸으며 자연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자연은 언제나 나에게 글감을 주고, 영감을 준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대지의 신이 어머니로 불리는 이유를 새삼 느낀다. ‘사람’과 ‘사람이 만든 시스템’에 상처를 받을 때면 언제나 자연에게 위로를 얻는다.
겨울이 오기 전이면 꼭 비가 내린다. 덕분에 간신히 나뭇가지에 매달려 가냘프게 흔들리는 단풍들이 대부분 떨어진다. 마지막 남은 한 잎은 무척 쓸쓸할 것 같다. 저 잎은 어서 떨어지고 싶을까 조금 더 나뭇가지에 머물고 싶을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낙엽들을 보면 아련한 마음이 들어 뒤숭숭해지곤 하는데, 비에 젖은 낙엽더미를 보면 처량하고 애달픈 감정이 듣다. 그 모습 자체로도 그렇지만, 관청 공무원들에게는 골칫거리로 여겨지는 사실 때문에도 그렇다. 나에게 얼마 남지 않은 즐거움이자 위로인데 말이다.
가을비에 홀딱 젖은 낙엽을 밟으면 처벅처벅 소리가 난다. 비 오는 가을날의 유일한 좋은 점은 가을 향기가 더 짙어진다는 점뿐이다. 흐린 가을날은 그토록 우울할 수 없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잿빛의 잎들은 이제 제 색을 모두 잃었다. 땅에서 위로 솟는 푸른 잎들도 희멀건 갈색을 띠며 고꾸라지고 있다. 사람들의 눈길은 그들로부터 멀어진다. 나무는 해마다 늙어가고, 해마다 젊어진다. 나는 이제 또 다른 자연의 선물인 첫눈을 기다린다.
ps. 나는 단풍이 한 종류의 낙엽만을 뜻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단풍(丹楓)은 계절 변화로 인해 식물의 잎이 붉은빛이나 누런빛으로 변하는 현상, 또는 그렇게 변한 잎을 뜻하는 한자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