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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Jan 13. 2023

읽기 힘든 책

소년이 온다.

날서린 칼바람이 옷 틈새와 맨살을 스미는 겨울날, 훈훈한 공기에 얹힌 커피 향이 자욱한 카페에서 이 책을 펼쳤다. 10장쯤 읽었을까,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johnny stimson의 flower가 들려왔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혼란함은 순식간에 옅어졌고, 계절풍 따라 떠나는 철새처럼 나의 마음은 음악을 향했다.

혼란스러웠다. 화기애애한 대화소리, 간간이 들리는 웃음소리들로 채워진 평화로운 곳에서 이토록 쓰라린 책을 읽고 있음에 이질감을 느꼈다. 포슬포슬 무리 지어 피어있는 안개꽃 표지와 그 속에 들은 이야기의 대비된 모습이었다. 나의 상황은 책 겉모습과 비슷했다.

나는 책을 덮었고, 적막이 가득한 집에서 주말 내 완독 했다.

소설의 힘이 막강한 줄은 익히 알았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과거 수많은 지배자와 권력이 왜 그토록 예술과 문학, 언론을 억압하고, 검열하고, 재재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말과 글의 힘, 이야기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그러지 않으면 본인들의 이상향은 지킬 수 없음을. 온갖 악행을 저질러서라도 억제하고, 막아야 했다. 그것이 훗날 본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평판과 대가를 치르게 할지라도 말이다. 그들이 느꼈을 은밀한 공포와 막연한 두려움을 나는 짐작할 수 있다.      

반면 그들 반대편에 선 시민들의 심경은 감히 헤아릴 수도, 짐작할 수도 없다. 나는 고작 이틀 동안 215쪽에 달하는 소설책을 읽었을 뿐이다. 종종 그 사건에 관한 자료나 영상을 보았을 뿐이다. 활자 따위를 읽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심장이 옥죄어오는데 어찌 그들을 이해하고 온전히 공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읽고, 기억하는 것밖에 없다. 나는 단숨에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일정 문단마다 숨을 고르며 읽어야 했다.

질량이 커지면 커질수록 강해지는 중력처럼, 그리고 블랙홀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나에게 빨려 들어오는 이야기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내가 소멸될 것만 같았다. 나조차 돌이킬 수 없이 이야기 속으로 영영 떨어질 것 같았다. 나는 이들의 심정을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볼 뿐이다. 나열된 사건을 남의 입을 빌려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각 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단 한 사건에 휘말린다. 책임은 최종결정권자를 향한다. 하지만 그는 이제 없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 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누가 할 수 있을까. 혹여 명쾌한 답이 있다 해도 그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 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나는 앞서 소설, 글, 활자를 ‘따위’로 취급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 마음에 세기는 문신이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 년간 몸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키고,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글은 우리의 가슴에 새겨진다.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4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슬픔을 작가 김훈 선생님이 표현한 것이다. 남겨진 5.18의 사람들도 40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슬픔을 느낄까. 아니면 그때 당시처럼 여전히 생생한, 날것의 슬픔을 느낄까. 풍화되지 않은 울분과 절망의 분노가 여전히 그들의 심장을 짓누르고 있을까. 그들이 겪었던 일, 그 후의 삶과 현재의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과 마음이 저릿해진다. 우리는 왜 이토록 끔찍한 일들과 그 속을 산 사람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총을 쏠 줄도 모르는 동호와 같은 학생들이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은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냥, 마음이 그러하니까 ‘라고 설명하는 게 최선이다.


사망자 165명. 부상 후 사망자 376명. 행방불명 77명. 부상자 3378명. 기타 910명. 총 4634명. 2015년 기준 5.18 관련 피해자 수다. 그리고 그들과 이어진 운명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마주할 결심을 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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