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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Mar 10. 2023

겨울을 보내며

나에게 겨울은 말 그대로 겨울이다. 밖도 춥고, 집도 춥다. 모든 감각과 신경이 마비되고, 마음과 정신은 얼어붙는다. 바람과 햇살을 좋아하는 나에게 칼바람뿐인 겨울은 너무나 가혹한 계절이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전혀 생기지 않는다. 그냥 이불속에 틀어박혀있고 싶다. 아니면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나 마시며 책이나 실컷 읽고 싶을 뿐이다.

겨울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남겨놓은 메모장을 보니 이번 겨울 첫눈은 12월 9일이었나 보다. 정확한 일기(一氣)는 아니다. 내가 겪은 첫눈 날짜이다.


예전부터 첫눈의 정의가 궁금했다. 지인들이나 뉴스에서는 한해의 24 절기 중 19번째 절기인 입동이 지나고 오는 첫 번째 눈을 ‘첫눈’이라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에게 첫눈은 1월 1일 이후에 내리는 첫 번째 눈이 첫눈이다. 아무튼, 첫눈이 오는 날 호기롭게 메모장을 켜고 겨울의 감상을 틈틈이 끄적거려 보긴 했지만 실패했다. 겨우 5줄 정도 썼다.




12월 9일. 첫눈이 내렸다. 이른 오전부터 내린 눈이 제법 쌓여간다. 도로 위로 떨어진 눈은 차바퀴에 짓눌려 내리는 족족 녹아 없어진다. 쌓일 만하면 악마에게 성수를 뿌리듯 염화칼슘 세례로 가차 없이 녹여 없애버린다. 차도는 눈이 머물 수 없는 성역. 금단의 구역이다. 염화칼슘 세례를 받고, 차바퀴에 짓이겨진 도로 위 눈을 보면 정말 악마의 시체가 갈가리 찢긴 채 널브러져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세상의 모든 악, 좋지 않은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거무튀튀해진 눈 잔해는 다시 정화되어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물이 되기 위해 하수구, 정화조로 흘러들어 간다.


비도 그렇고 눈도 그렇고 내리는 그 순간의 경치는 모두들 좋아라 하지만, 떨어져 깨지고, 흩어졌다 다시 한데 모이는 비, 무분별하게 땅에 널브러져 일시적이지만 새로운 지층을 만드는 눈 다발은 썩 좋아해 주지는 않는 것 같다. 땅에 고인 비는 신발과 옷을 더럽힐까, 소리 없이 곱게 쌓인 눈은 추운 날씨에 얼어붙어 차나 사람을 미끄러 넘어트리지는 않을까 싶어서다. 하지만 눈과 비는 결국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그리워할 애증의 대상이 돼버린다.


낙엽이 머물던 횡 한 나뭇가지 위로 새하얀 눈이 어린 새처럼 살포시 내려앉았다. 사람이 보기에 그 모습은 겨울의 미묘한 아름다움이지만, 나무는 살 떨리게 춥지 않을까 괜한 생각이 든다.

이와 다르게 푸른 소나무 위로 소복이 쌓인 눈은 겨울의 으뜸 풍경이다. 상록수는 차갑고 무거운 겨울의 무게를 기꺼이 견뎌낼 수 있게끔 태어난 존재이다. 겨울을 마주하는 상록수는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안쓰럽다는 생각을 품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 못지않게 강인하지 못한 듯 보이는 나를 바라보며 때때로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게 해 준다.


출근을 하다가 새벽이슬처럼 옹글게 맺혀있는 봉오리를 보았다. 흔하디 흔한 가로수인데 어떤 나무인지, 꽃인지 아니면 꽃이 피지 않는 식물인지 알지 못했다. 올봄에는 주변에 심어진 나무나 꽃들의 이름에 관심을 가져야겠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마음에 더 새겨 봄을 맞이해야겠다. 결국 사랑은 이런 관심에서 시작되니 말이다.


새들도 겨울이 싫어 외출을 하지 않은 건지, 목청을 뽐낼 기분이 아닌 건지 새들이 있을 법한 곳들을 가보아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간간히 까마귀 울음소리나 까치의 소리가 스타카토로  짧게 들릴 뿐이다.

겨울철 도로에서 들리는 자동차 경적음은 사계절 중 가장 날카롭게 들린다. 운전자가 상대방을 신경 써서 ‘나는 그쪽에게 신경질적으로 의사 표현한 것은 아니에요.’라는 마음을 담아 짧고 약하게 눌러도 마찬가지다. 겨울의 공기는 ‘철’ 같다.

소리는 결국 공기를 매개로 삼고, 실제로 겨울철에는 온도가 낮아 운동량이 적고, 공기의 밀도가 높아서 좁은 경로를 따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전달되는 탓에 날카롭게 들리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겨울이 내 마음을 각박하게 만들어서 괜히 그렇게 들리는 것일까. 겨울은 여러모로 마음이 박해진다.


절기상 사계절은 공평하게 4개월씩이다.

체감상 겨울은 봄, 가을보다 길다.

막상 사진첩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겨울이 봄, 가을보다 짧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짧다.

봄꽃과 낙엽은 석양처럼 찰나이다.

그들에게 너무하다고 사정을 해보아도 소용없다.

그 짧은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는 것이 최선이다.

나는 모든 계절을 공평하게 대하지 않는다.

봄과 가을을 편애한다.


오늘은 올봄 들어 기온이 가장 높은 날이다. 날씨를 보니 다음 주는 꽃샘추위가 오려나보다. 봄꽃을 시샘하는 겨울의 추위라 해서 이름 붙인 꽃샘추위. 봄을 지연시키려는 못된 심보.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투정이라도 부리는 걸까. 다음 겨울엔 그러지 말고 겨울을 좀 더 좋아해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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