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 일부이다.
이처럼 시는 은유로 쓰인다.
은유는 단순한 원자 구조 집합체(모든 물질)에 영혼을 부여하는 것이다. 매일, 매 순간 똑같이 운동하는 원자 집합체처럼, 단순한 일상이 조각나 저마다의 의미가 사라진다면 그 일상을 살아내는 인간의 영혼 또한 흩어지는 것이다.
은유는 곧 의미이다. 인간 스스로가 다른 모든 원자 집합체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유로 항상 거론되는 것이 영혼의 존재 여부다. 영혼이 정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고 살아간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의 핵심 주제 역시 상상하는 능력과 그것을 기꺼이 믿는 능력이다. 세상은 인간에게만 필요한 가치와 상징들로 가득하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은유를 여러 번 언급했다.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랑은 은유에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 당시 토마시는 은유란 위험한 어떤 것임을 몰랐다. 은유법으로 희롱을 하면 안 된다.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장,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근본적이며 인간적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은유에서 태어난다.’
이처럼 인간의 삶 전체를 은유와 비유, 상징 그 자체라 여겨도 무리는 아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인간이 만들고 믿는 가치의 힘이 강할수록 집단의 결속력과 규모가 커지고, 문명이 지속될 가능성 역시 커진다. 이것들이 사라진 인간 사회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지금과 별 차이가 없을까? 그 순간 인간은 생태계 먹이사슬 최하위가 되고 말 것이다. 개인의 삶 또한 그와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
지루한 삶을 견딜 수 있게끔 큰 역할을 하는 것 중 하나가 이야기이다. 허구의 공간과 시간, 사건들이다. 전기가 없던 시절, 불이 없던 시절 인간은 하늘을 보며, 별을 보며, 태양을 보며, 눈앞에 펼쳐진 모든 자연을 보며 수많은 신화와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것이 그들에게 최고의 오락거리이자 낙이었을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를까? 인간은 기초과학에서 파생된 수많은 기술, 의학 등 여러 방면에서 극적인 진보를 이루었다. 세상이 얼마나 광활한지 모르고 평생 한 동네에서만 살다가 죽었던 인간은 전 세계를 누빌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우주여행, 화성 거주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소식들보다 새로 나올 드라마, 영화, 좋아하는 작가, 가수, 다른 방면의 예술가들의 소식들을 더 기다리고 흥미로워한다. OTT가 나오면서 어느 때보다 많은 이야기가 생산되고, 소비되고 있다.
우리의 조상들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별다를 바가 없다. 원형극장에서 연극을 즐기는 로마, 그리스 사람부터 저작거리에서 전기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하루의 낙으로 여기는 조선사람, 일과를 마치고 넷플릭스를 보며 맥주는 마시는 나나 똑같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속에서 살아왔고, 살아가며 동료나 가족, 친구들이 주지 못하는 위로와 용기를 받고 기꺼이 내일을 살아낸다. 우리에게 이야기가 없다면, 이야기에 관련된 어떠한 것에도 접근할 수 없다는 명령을 지켜야만 한다면,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주로 이야기를 소비하는 쪽인 나도 견디기 힘들 텐데, 예술가들은 어떨까?
예술은 평범한 사람들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모든 부분을 집요하게 부여잡고 보여주는 것이다. 너무 흔해서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가치를, 순식간에 휘발에 버리는 감정과 생각, 본성을 드러내 전시하는 일이다. 철저히 현실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허영의 욕구와 욕망을 상징으로 일깨워주는 일이다.
흔히들 위대한 예술가의 삶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보다 가치 있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많은 예술가들은 신경쇠약증에 걸리거나 단명했다.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문학가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시인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라 칭송받고는 한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누구나 사용하는 평범한 문자, ‘글’로 평이한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최적의 단어 몇 가지만 가지고 일순간에 상상력을 자극해 영감을 주고, 깊은 여운과 깨달음을 인장처럼 새겨 버리기 때문이다.
시인은 삶에서 가벼운 것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모든 것을 수집한다. 평범한 모든 것, 단순한 모든 것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그리고 말해준다. 인간은 결국 거창한 행복, 찰나의 쾌락이 아닌, 평이한 일상으로 살아간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거창한 행복과 평이한 일상은 구분 지어질 수 없다고. 세상에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은 구분 지어질 수 없다고.
누군가는 달은 보고 아주 오래전에 지구에서 떨어져 나온 암석 덩어리에 불과하다 말하고, 누군가는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려 애절한 시를 쓰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보름달이 뜨던, 그믐달이 뜨던 고개를 핸드폰으로 떨구기도 한다.
시는 이들 중 누구의 삶이 더 옳은지 말하지 않는다. 은유와 상징으로 은근히 암시할 뿐이다. 하지만 그 암시는 어떠한 명령, 지침보다도 강력하다.
인간은 눈앞에 드리울 죽음을 인식하는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 유한한 세상을 살아가는 필멸의 존재 인간이 무한한 영원성을 기리며 만드는 모든 것. 예술, 문화, 정치, 국가, 단체, 가치, 이데올로기, 과학이론, 종교 속에는 결국 영원을 기원하는 간절함이 담겨있다.
인간은 ‘모든 만물은 기본 입자로 이루어져 있고, 구성 요소가 같으면 동일한 물질이다.’라는 환원주의를 넘어서는 존재가 아닌 것을 알기에 끊임없이 이상을 추구하고, 실제화한다.
이 삶이 비록 역경의 연속일지언정 끊임없이, 그럼으로써 자기가 겪을 고난을 기꺼이 견뎌내면서까지 이야기를 쓰는(어떤 형식이든) 이유는 미토콘드리아가 생명 유지에 필수인 것처럼, 인간의 창조 활동이 인간 정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소비자이든, 생산자이든)
영원할 것 같은 지구 역시 한철 피고 질 꽃 한 송이와 같다. 그 속에서 찰나를 사는 인간에게 불변하는 상징과 은유로 쓰인 시와 문학, 예술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가진 의미는 우리의 영혼과 같다. 그 자체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꽃’ 마지막 부분이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하나의 ‘의미’ 이것이 결국 이야기의 핵심,
유한한 삶의 이유이자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