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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em Jan 30. 2021

겨우 이런 거였다니.

나 스스로 온전히 나 일수 있다면

삶에 스며드는 사람이 있다. 함께 하는 것이 좋은 것을 넘어선, 삶의 곳곳에 짙게 스며드는 사람이 있다. 너무 익숙해서  삶의 일부가 되는 사람 말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부재할   존재가 얼마나 컸는지 표명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고 나를 가장 사랑해주던, 관계 속에서 가장 편안하고 나다울  있었던  삶에 스며든 사람들을 너무 많이 잃어보았다.
    
 그런 사람들은 사라질 때마다 나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든다.  ,   잃을 때마다 세상에 점점 혼자 남겨지는, 이미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누군가를 잃을 때마다  혼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소중한 사람은 잃으면 너무 아프니까,  이상 소중한 사람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그때부터 자립에 대한 강박관념이 생겼다.  삶을 홀로 짊어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경제적 능력 같은 것들에 집착했다. 관계 속에서 오는 즐거움이나 행복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 감정을 너무 억누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진심으로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되었고, 이런  모습이 성숙하고 어른스러우며 강인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이런 감정이나 생각들을 전부 인정하면 내가 너무 못나고 나약한  같았으니까. 그리움에서 오는 외로움과 고통은 언제나 남겨진 사람의 몫이다. 우리 뇌는 신체적 고통과, 사회적 관계에서 고통을 느낄  같은 부위에서 반응한다. 손이 잘리는 것과 가까운 사람을 잃는 것은 같이 고통스럽다는 말이다.  
 
 내가 나를 너무 많이 외면했기에, 언제나 나를 피해 도망 다녔기에, 언제나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감정에 휘둘리는 상황이 너무 많았다. 나도 모르게 기분이 상해서 말이 감정적으로 나오고, 제대로  마음을 전달하지 못했다. 진짜  모습은 너무나 나약하고 못난 존재여서 남들에게 보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 문득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의 부분 부분을 만났다. 외롭지 않다고 이야기 하지만, 누구보다 외로워 보이는 나를. 혼자가 편안하다고 이야기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할  가장 빛나게 웃고 있는 나를. 그리고 거기에서 느껴지는 커다란 괴리감을.     
 
 생각해보면 정말 소중했던 사람들과의 이별에서 오는 후회는 많은 시간을 함께 했음에도 언제나 조금이라도  함께하지 못한 것이었다. 내가 무얼 해도 미워하지 않고 그냥 있어줄  같은 믿음이 있고, 그렇기에 나다울  있는 관계. 이런 관계들조차 강인해지고 어른이 되면 필요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어린 시절 사랑에 길들여진 사회적 동물이었고, 무의식적으로 끝없이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전과 같은 안락함을 느낄  있는 관계를 형성할 누군가를.      
 
  오랜 기간 동안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사람이 좋아질수록, 또다시 사라지지 않을까 혼자서 불안했다. 좋아지는 것보다 훨씬  많은 불안을 느꼈다. 관계의 기반은 언제나 두려움에 기인한 불안이었다. 그렇기에 항상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의존하고 싶지만, 이미 의존하고 있지만, 그것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 답답한 줄도 모르고, 이게 아닌  같은데 라고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도망치고 있었다.
  
이런 자신을 오롯이 마주할  있게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런 나를 발견할  있었던 것도 내가 굉장히 사랑해서,  깊숙이 억눌려있는 정서까지 들어낼  있는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나보다 나를  알아봐 주기도 하는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나를 외면하며 살아왔지만 돌이켜 보니 좋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얽매여있는 것을 부인함으로 오히려 과거에  얽매인 상태로 지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자신을 용납하지 못해  자체를 부인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꼭꼭 숨겨놓아야  것만 같은 진짜  모습이 겨우 이런 거였다니.      
 
 고유한 존재에 호불호는 존재할  있겠지만,  존재를 다른 것과 비교해 완벽하지 않다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고유하고, 그런 자신을  알아봐 주어야 하는 것도 결국 자신일 것이다. 돌고 돌더라도, 결국  시작과 끝에는 내가 있을 테니. 내가 되는 , 단지 그것이면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온전히  일수 있다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영원이 아닌 순간일지라도 
전부가 아닌 일부일지라도 
그거면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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