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 외로울까
나는 시험감독관, 카페, 옷가게, 보안요원, 은행 청원경찰, 무대 설치, 사무보조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일부러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했다. 결국 아르바이트 선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급여 대비 노동의 강도가 됐지만, 그 와중에도 패션에 관심이 많아 옷가게에서 일을 많이 했다. 쇼핑몰은 참 신기한 곳이다. 무언가 ‘필요’한 물건을 사러 오는 분들도 있지만 ‘기분’을 사러 오는 분들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이야기만 잘 들어 드려도 굉장히 기분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잘 들어드리기만 해도 웃으며 물건을 구매하고 난 이후에도 감사 인사를 하신다.
내가 특별히 친절하게 웃으며 응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 답게 최저의 노력으로 최대의 수익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아르바이트생의 경우 대부분 임금은 최저로 고정되어 있기에, 일하는 시간을 어떻게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했다. 내가 찾아낸 방법은 손님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었다. 판매는 뒷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과 수다를 떨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 이 방법은 시간도 잘 가고 손님에게 친절하다는 칭찬을 받기도 한다. 나와의 대화가 재미있었던 건지, 나중에 다시 나를 찾아 주시는 분들도 더러 있었다.
이는 쇼핑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무 보조도, 청원경찰도, 보안요원도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직업은 없었다. 사무보조를 하더라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고, 옷가게나 청원경찰, 보안요원 등 어떤 일을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흔히들 서비스직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나는 모든 직업이 서비스직의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그 빈도와 정도가 다를 뿐.
다양한 일을 하면서 느낀 점은 잘 들어주기만 해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잘 들은 것을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가면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태어나서 잘생겼다는 소리를 27년간 몇 번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은행에서 청원경찰을 하면서 너무 심심해 이야기를 잘 들어드리려고 한 하루 동안 그때까지 평생 살면서 들은 것보다 사람보다 많은 분들에게 친절하고 잘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성형수술을 한 것도 아니고 하루 만에 잘생겨졌을 리는 없는데 참 신기한 일이다. '잘생겼다'는 말에 담긴 마음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고맙다'가 아니었을까.
이 뿐 아니라 같이 일하는 사람의 말을 잘 듣고 그 사람이 원하는 바를 알아차리면 일 자체가 수월하게 돌아가고, 일을 조금 못해도 욕을 덜 먹었다. 어릴 때는 ‘눈치 없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는데,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여 이야기를 듣고 반응하니 ‘센스 있다’라는 듣게 되었다. 센스 있다 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타고난 재치가 뛰어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잘 듣는 것만으로도 들을 수 있는 칭찬이란 걸 알게 되었다.
일을 하며 이야기를 듣던 중 문득 ‘사람들이 참 많이 외롭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는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이 많이 부재되어 있고, 이것은 사람을 참 외롭게 한다는 걸. 참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산다는 걸. 결국 사람에게 필요한 이야기 나눌 것은 사람이라는 걸. 부유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나이가 많은 사람도, 나이가 적은 사람도 대화 나눌 사람이 필요한 것은 다들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심리학의 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에서 밀려나 모든 구성원으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것보다 더 잔인한 벌은 생각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방 안에 들어가 아무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을 해도 대꾸도 안 하고, 무슨 짓을 해도 신경 쓰지도 않고, 만나는 모든 사람이 죽은 사람 취급을 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상대하듯 한다면, 오래지 않아 울화와 무력한 절망감을 견디지 못해 차라리 잔인한 고문을 당하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상대방과 커뮤니케이션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반대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에 대한 무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만큼 사람을 외롭고 힘들게 하는 것이 있을까? 가깝다고 믿는 관계일수록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은 커다란 외로움을 동반할 것이다.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대화를 건네주는 것. 커뮤니케이션 통해 존재를 알아봐 주려고 노력하는 것. 어쩌면 이는 다른 무엇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꼭 필요한 것 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