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존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에리히 프롬'이 자신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말한 '잘 사랑하는 방법'이다. 참 이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감정'의 영역보다는 '신념'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찌보면 흔한 말이지만 꽤나 숭고해 보였다. 나는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사랑하고 싶었고,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사랑 받고 싶었다. 똥강과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우리가 더 성숙해지면' 가능해지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기대감'이야 말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지금 상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못하기에, 상대방이 변하기를 바라는 '욕심'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미숙했고, 스스로의 미숙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내 행동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똥강이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녀가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상처 받을 것 같은 두려움에, 무심코 했던 내 미숙한 언행은 우리에게는 너무 큰 시련으로 돌아왔다.
연인이 친구들과 주고받는 대화가 궁금하고, 더 나아가 그 내용을 몰래 훔쳐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기는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연애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수록 그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이 '전부'가 아닐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호기심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독이 되기도 한다.
똥강은 내가 친구들과 한 카톡 대화를 훔쳐보았다고 했다. 내가 종종 똥강의 카톡을 힐끗힐끗 보고, 나는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친구들과 한 대화를 꽤나 많이 보았고, 그 내용은 똥강에게 결코 즐거운 내용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당시 내 민낯 같은 것 아니었을까. 당시 나는 똥강의 아쉬운점을 종종 친구들에게 털어놓았고, 똥강은 내 불편한 마음이 담긴 말들을 직면했다. 웃긴 사실은 나는 내 카톡 대화내용을 보더라도 별 문제가 없을거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런 말들을 친구들에게 쏟아낸 사실 조차 잊고 있은채.
나도 전 연애 때 똥강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때는 내가 카톡을 본 입장이었고, 오히려 상대방은 '왜 카톡을 봤냐'며 화를 냈었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은 아마 "니가 날 이렇게 생각하면 뭣하러 만나"정도 였던것 같다. 배신감이 꽤나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사건은 결국 상대방의 사과로 마무리 됐고, 나는 그 이후로 상대방이 친구들과 한 카톡을 보지 않았다. 상대방이 진심으로 사과 하는 듯 했고, 또 내가 완벽할 순 없기 때문이다.
꽤나 자주 다툼이 있었고, 어쩌면 그 정도 숨 구멍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내 생각엔 연애를 함에 있어 일종의 '필요악' 같았달까. 당시에는 쿨하게 넘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뚜렷히 기억나는걸 보면 나에게도 꽤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나보다.
똥강은 내가 아니었고, 이전의 나와 같은 상황도 아니었다. 내가 친구들에게 토로한 감정은 꽤나 진했고, 나보다 훨씬 섬세한 똥강에게는 굉장히 큰 충격이었다. 나는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리라 생각했지만, 똥강은 그만 하자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똥강의 나에 대한 '믿음'의 근간에 폭력을 가했고, 이 폭력으로 인한 상처는 쉬이 회복될 수 없는 상처였다. 이 사건은 우리가 연애를 하며 지속적으로 다투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자리잡는다.
모든 사랑의 끝은 세드엔딩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똥강과 나의 연인관계라는 이야기도 언제가는 반드시 끝이 날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이 사건이 여전히 우리에게 아픔으로 남아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애써 아픔을 외면했을 수도, 묵묵히 아픔을 견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악의는 아니었습니다. 미안합니다.